(좁다 보니) 문 밖까지 줄을 서는 경우도 있다. 붐비는 시간에 한 친구가 제일 큰 사이즈의 민트초코 버블티를 급하게 챙기다 쏟았다. 연한 청록 물결을 다급히 덮으며 민트초코를 바로 다시 만들어 전하고 역시 바쁜 뒷친구들 음료를 빠르게 건넸다. 휴우 지나갔다. 폭풍이 지나가고 구석구석 민트를 찾고 또 찾아 닦았다.
공백 뒤 방문하시면 그간의 안부를 전하는 분들이 계신다. 보통 어르신께서는 ' 내가 수술을 했어', '여행 다녀왔거든', '우리 손주가 아파서'로 시작하시고 어머님께서는 아이 이야기, 시댁 이야기, 남편 이야기를 꺼내시고 학생들께서는 학교 생활, 시험 일정과 성적, 이성친구 일상을 전한다.
많은 근황 토크 중 형광펜 덧칠된 문장에는 '대조'와 '반전'이 있다.
"얘는 여친 생겼고요, 저는 차였습니다."
더 물을 것이 없다. 딱 한 문장에 두 등장인물의 긴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냥도 쓸쓸한 가을이 좀 더 고독할 화자의 심정까지 아스라이 전해진다. 해맑은 표정과 듬직한 복식호흡이 담백한 대조에 더해져 응원 선물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행운인데 행운이 아녜요."
초등학교 2학년의 문장이다. 무릎 꿇고 싶을 정도로 깔끔하다. 행운은 오늘 영어 선생님께 드릴 예쁜 스티커를 잘 챙겼다는 것이고 행운이 아닌 건 영어 숙제를 집에 두고 온 상황이라고 했다.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하는 순간 아가는 한 번 더 반전을 던진다. "그런데 또 행운이 있어요! 오늘! 그 책을 안! 배워요." 울기만 할 일도 웃기만 할 일도 없다는 인생의 비밀을 아가의 완성형 문장에서 배운다. 고요한 내 삶에 ‘빵’ 하는 반전 좀 날리고 싶어 반전 담긴 문장에 끌리는가 보다.
"문장 규칙 셋. '대조'와 '반전'을 활용하라."
흡입력 있는 대화를 아는 친구들은 '도치'를 남다르게 이용한다.
이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중학생이 있다. 수학을 잘하는 이 친구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구시렁거리듯 말하는 매력을 지녔는데, 도치 담긴 문장을 참 잘 쓴다.
보통 일이 있어 한동안 못 온다는 말을 전할 때, '저 이제 오래 못 와요. 왜냐하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수학 우등생 친구는 다르다.
(원인 먼저 제시) "장학금 받은 돈으로 버블티 사 먹었는데 이제 거의 다 썼어요."
(이 얘기를 왜 하나 궁금해질 때 결론 등장) "앞으로 잘 못 온다는 의미죠."
(당분간 못 온다더니 앗. 바로 왔네!) "오 또 장학금 받았나요?"
(동문서답 같아 호기심을 자극하는 원인 먼저) "어른될 때까지 친척들께 용돈 받으면 엄마 다 드리기로 했어요."
(앞뒤를 조합하자니 이해가 어렵고 연결이 어려우니 궁금증 더해짐) "아 그럼??!!"
('아하'소리 나는 결론) "명절 용돈 다 반납하는 조건으로 용돈이 올랐거든요. 그래서 왔습니다. 또 올 겁니다."
"문장 규칙 넷. '도치'를 활용하라."
유난히 기억력 좋은 친구들이 있다. 그럼 말로 이기긴 어렵다.
"너 지난번에 빌린 돈 왜 안 주냐!"
"내가 언제?"
"2023년 9월 1일 금요일, 영어학원 가기 전에 불닭볶음면이랑 전주비빔 삼각김밥, 환타 제로 파인애플 먹을 때 돈 부족하다고 해서 내가 3,000원 빌려 줬었잖아. 기억 안 나냐?"
이 뾰족한 문장은 3,000원 이체 확인증 없이 이길 수 없다. 속 시원한 문장력과 개그콘서트 수다맨 같은 대사처리에 매료된 나는, 홀린 듯 "3천 원 제가 갚아 드릴까요!" 하고 말았다.
어르신들의 문장도 그렇다.
"내가 여기 오래 살았거든."보다 "내가 서울 OO구 OO동 OO아파트 O동 OO호에 OO 년 살다 1995년 12월 OO일, 그러니까 우리 큰애 O살 때 OO아파트 O동 OOO호로 이사 왔어."는 잊히지 않는다. 무슨 아파트 몇 동 몇 호였는지는 기억 못 해도 그 어르신과 대화하는 순간은 몇 번이고 그대로 재생된다.
숫자가 없는 문장에서도 비슷하다.
"맛없었어요."보다 "토란국이 나왔는데 토란 잘라진 단면이 문어 대가리 같아서 좀 별로였어요."가 인상적이다. (이어진 대화 : "으하하. 문어 대가리 본 적 있어요?", "아니요.")
"넘어졌어요."보다 "제가 또 흘릴까 봐 손에 조심히 들고 가다가 발에 갑자기 뭐가 걸리는데. 아니 바닥에 있는 돌이 쪼끔 튀어나왔던 거예요. 제가 또 순발력이 있잖아요? 딱. 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빡. 줬는데 그러다 아이스크림이 날아간 거죠. 대신 저는 안 다쳤습니다. 물티슈 있나요?"가 기억에 남는다.
고객님들께 잊히지 않는 문장 쓰는 법을 배운다.
"문장 규칙 다섯. 정확한 표현을 활용하라."
마음을 당기는 문장에 대해서도 배운다. 좋은 문장과 덜 좋은 문장을 고민하게 된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감사를 전한다. 그런 내 모습을 고객님들께서는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신다.
단체 주문이 들어와 바삐 움직이는 나를 보시며 한 고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걸 언제까지 할 거야? 몇 살까지 하겠어 이런 걸."
땀 흘리던 열심이 깜짝 놀란다. 가게가 즐겁지 않았다면 좀 아팠을 법도 한 문장이었다. 재미 없어질 때까지 할 것이라 답했지만 썩 좋은 언어는 아니라고 느꼈다. '이걸', '이런 걸'이라니. 내게 '힘들지 않냐?" 했던 말씀들이 '이런 힘든 걸 이 나이에 왜 하고 있냐?'의 의미였을까 매우 잠시 생각했으나 비약은 멈추기로 했다.
며칠 뒤, 역시나 부지런히 움직이려는 나를 보시며 한 어르신께서 말을 건네셨다.
"뭐라도 할 나이네. 좋을 때다. 예쁠 때야. 열심히 하니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
'체크 원피스 잘 어울리는 고객님께서 더 예쁘셔요. 오늘 라탄 모자도 정말 멋져요' 소리 절로 나오는 말씀이었다. 좋은 문장을 사용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 상대에게 '너는 배려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하는 마음을 전하는 좋은 말의 어른이고 싶다.
"너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애들이 학교 끝나고 소파에서 엄마와 살 비빌 수 있어야 아이들 정서에 좋지(나도 14년 집에 있었는데......).“ 보다는 "언제든 엄마 보고 싶으면 와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해주는 언니이고 싶다. '미안한 말이지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는 쓸 일 없는 어른이 될 것이다.
"여자친구가 아픈데 뭘 선물하면 좋아할까요. 여기 자주 오던데."(또, 아들 키우는 법을 배운다.)
"엄마 생신인데 제일 단 커피가 뭐예요? 단 걸 좋아하세요. 초코우유 같은 커피도 있어요?"
"우리 집사람이 손주 유학 가고 우울한지 집 밖에 나오질 않아요. 코코넛 버블티 사가면 좋아할까 해서."
"동생이 제가 먹은 달고나 버블티 컵 보고 울어서 오늘 사줄 거예요."
"퇴근할 때 와이프가 꼭 타로 스무디 사 오라 해서. 사장님께 인사 전해달래요. 참! 시럽 반만 넣어주세요"
마음을 불러내는 문장들을 돌이키다 보니 안심이다. '내가 칭찬하면 네가 우쭐거리겠지' 하지 않고 솔직하게 진심을 전하는 문장. '내가 곁에 있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담긴 문장. 그리고 그 마음을 전하는 가게.
글도 가게도, '재능이 없다', '작고 별 것 없다'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진심을 전해야지. 작은 가게에 새겨진 문장들을 받아 적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글, 좋은 가게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착각에 중독된 나는 오늘도 달린다. 민트향 품은 작은 가게로.
"손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꺼내 봐요. 그게 뭐야. 더 많이 담아봐요." 어르신의 검은 비닐에는 예쁜 밤이 들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