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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별 Oct 22. 2023

20시 40분의 아메리카노

작은 가게 아메리카노는 귀여운 시작입니다.

 아메리카노 1800원부터.


 화사한 가격 '900원부터'도 많아 '저가'라 이름 붙이자니 머리 긁적이는 아메리카노. 놀라운 규모의 로스팅 카페도 많아 '전문'이라 수식하자니 눈치 보는 아메리카노.

 커피학개론 그 자체이신 장인의 철학이 담긴 커피도 많고 몇천만 원 상당의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내려오는 커피도 많은 커피 세계. 작은 가게 수줍은 아메리카노에는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을까.


 시작하는 아메리카노.

 3년 6개월간 작은 가게 아메리카노의 이름은 '시작'이었다. 14년 전업 주부였던 나의 시작이었으며 매일 같은 시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시는 고객님들의 시작이었다.


휴일의 시작은 아메리카노, 남편과 우리 동네 커피맛집 엑시트에 앉아.


 작은 가게 아메리카노에는 귀여운 시작들이 담겨 있다.


 버블티, 스무디, 에이드. 달달한 음료를 마셔오던 친구가 어느 날 아메리카노를 시킨다면, 시작이다. 공부의 시작. 고 2, 고3 때 등장하는 삭발과도 같은 의미이다. '저 이제 공부합니다' 하는 직진 예고. 아메리카노로의 음료 전환을 택한 친구들에게 무한한 응원을 품고 커피를 내린다. 주문을 외우는 주술사의 마음으로.


 매년 마감 직전 같은 음료만 사가는 고3학생이 몇몇 생긴다. 인사 외 먼저 말을 걸진 않는다. 예민한 시기 루틴에 방해가 될 수 없으니. 친구들이 가끔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모의고사 보았다는 이야기라던가 수능이 얼마 남았다는 소식이라던가. 그야말로 '스몰'인 스몰토크를 남기고 밤공부 시작을 위해 떠난다.


 저녁 8시 40분경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던 목소리 좋은 친구가 있었다. 같은 시간 오로지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그 친구는 수능이 끝나고 들러 커다란 초코를 시켰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게 정말 먹고 싶었어요." 주문할 때 1초의 고민도 없이 매번 아메리카노를 빠르게 누르던 친구였는데 사실 초코가 먹고 싶었구나. 그 친구가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학교 학과의 과잠을 입고 나타났을 때, '놀라운 성공은 루틴과 인내의 결과‘라는 자기 개발서를 읽은 기분이었다. (그해 스승의 날은 꽤 더웠지만 두툼하게 입고 왔다. 부풀어 오른 과잠에 '좀 덥겠다' 생각했으나 함께 온 친구가 '이것 좀 보세요' 하며 점퍼의 뒷면을 보여줄 때, '아하. 더우면 맨살 위에라도 꼭 입어야 하는 과잠이었네' 생각했다. 땀이 차도 그저 자랑스러울 이름. 긴 시간 흘린 땀으로 얻어낸 이름이었다.)


 다음 해 마감 전 들러 아메리카노만 주문하던 키 큰 친구도 수능을 마치고 제대로 들은 건가 싶은 소식을 전했다.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학교라 했다. 텔레비전에서 보게 될까 고객님 진로를 상상하자니 성취의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나의 일이 뿌듯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 전 시골 방문 등의 아주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9시 마감 시간을 지키는 것은 그 시간이 시작인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얼음 적게 아이스티만 주문하시다 음대 입학 소식을 알리며 꽃과 편지를 전해주던 고객님. 따뜻한 녹차버블티만 드시다 전문직 시험에 합격했다며 양복을 입고 나타난 고객님. 멜론멜론멜론 또 멜론, 오로지 멜론만 선택하시다 영재 고등학교로 떠난 고객님. 샷추가한 토피넛 버블티만 좋다 하시다 취업 후 본가에서 독립한다는 상경 소식을 전한 고객님.

 공통점은 같은 시간 정해진 음료. 성공의 비결은 'O시 OO분 OO만 먹는다'인가 보다. 나도 진로 있는 인간이 되겠다는 희망사항을 아메리카노 위로 적어본다.




'앗 10분 전 아메리카노 사가셨는데!'


 조금 전 다녀가신 고객님께서 다시 입장하시면 긴장된다. 빨대를 안 드렸을까. 음료를 잘못 드렸을까. 울기 직전의 재방문 아가인 경우 음료를 쏟고 달려온 것이니 다시 만들어 주며 달래곤 한다. 어른 고객님의 경우 동료분 커피를 추가 주문하실 때가 많다. 그런데 각자 따로 음료를 사가셨던 젊은 남녀 고객님께서 함께 오신다면 그것은 '시작'이다.


 2시 좀 넘어 남성 고객님께서 아메리카노를 사가셨고, 5시 여성 고객님께서 아메리카노를 들고 가셨다. 그런데 5시 10분경 두 분께서 다시 들어오시는 것이다. 처음인 것처럼. 눈치 없이 "왜 다시 오셨냐?"를 꺼내서는 안 된다. 평소처럼 "안녕하세요!" 두 분은 핑크빛 존대라 쓰고 싶은 느낌의 존대어를 나누며 주문한다. "커피 드셨어요?", "아뇨." 아메리카노 두 잔. 조금 전 구매하신 아메리카노는 책장 밑에 숨겨져 있을까. 옆자리 동료에게 선물하셨을까. 첫 커피의 행방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5시 10분의 아메리카노가 두 분께 오늘의 첫 커피라는 것이 중요하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바로 듣지 못하신다. 아니면 바로 일어서기에 대화가 즐거우신지도 모르겠다. 살짝 카운터에 올려둔다. 미소 지으며 커피를 들고 사라지는 두 분의 뒷모습에 행복하다. 호감의 시작이란 직전의 아메리카노는 없던 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버블티만 먹는 남학생이 있다. 학원 친구들과 와도 학교 친구들과 와도 초코든 딸기든 타로든 어찌 되었든 버블티이다. 그런데 하루는 귀여운 여학생과 함께였다. 네 컷 사진을 찍었다며 자랑한다. 그리고 음료를 주문한다. 아메리카노. 파우더도 더 달게 시럽도 더 달게 넣어달라던 아가가 잘 보이고 싶은 여자친구 앞에서는 아메리카노이다. 아직 커피를 못 마신다 했었지만 중요한 건 ‘커피를 마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커피를 손에 든 남자가 되는 것'이다. 커피만 마셔온 남자를 대하듯 자연스레 아메리카노를 전한다. 이 아메리카노가 '진짜 시작'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바닐라라떼만 마시던 친구의 아메리카노, 펄 추가한 연유라떼만 먹던 친구의 아메리카노, 알로에 들어간 민트초코만 주문하던 친구의 아메리카노. 이성친구와 함께 방문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고객님께 '오~ 오늘은 아메리카노네!' 같은 대사는 금지다. 한껏 차려입은 옷에 물을 뿌려서는 안 된다.


 시현이 준우에게 말해 주어야지. 커서 마음 가던 사람이 커피 마셨냐 묻는다면, 책상 위 커피는 슬쩍 감추라고. "마침 커피가 정말 필요했어요. 제가 살게요." 해보라고. 허세의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준우를 상상하며 씰룩거리는 입가를 달랠 아메리카노를 담는다.




"다이어트만 끝나면 타로 스무디 마실 거예요 진짜!", "뺄 것도 없는 분께서 진짜!"


 "이제 진짜 빼야 해요. 큰일 났어요."

 쿠키초코 스무디만 주문하던 분께서 아메리카노를 누르신다. 다이어트 시작을 알리시는 고객님 아메리카노를 준비하며 양심이 콩닥인다. 원피스 안을 가득 채운 몸과 시럽 담긴 텀블러, 퇴근 후 먹기로 한 파 닭꼬치가 부끄러워지는 단어, 다이어트. 아메리카노 스몰토크 중 자주 등장하는 사연이다.


 공복 운동을 마치고 달아오른 열감을 낮추려는 아침 아메리카노, 샐러드만으로 풀기에는 심심한 배를 달래는 점심 아메리카노, 남은 일과를 위해 부족한 기력을 일으키는 오후 아메리카노, 밤운동까지만 힘내보자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밤 아메리카노. 해내는 분들의 작아지는 얼굴을 보며 아메리카노에 존경을 담아 전한다.


 곰돌이 푸처럼 귀여우신 고객님. 호탕한 웃음소리로 작은 가게를 채워주는 분이시다. 귀여움의 상징 같았던 고객님께서 이제 곰돌이 옷을  벗으셨다. 똑똑한 사람은 실행력도 똑똑하기 때문인지 다이어트를 시작하시자마자 푸바오 떠오르던 배를 떼어내신 것이다. '곧 데뷔하시나요!' 소리 절로 나는 성공이 부럽다. 식단관리만으로 20킬로그램 넘게 감량했다 하신 고객님도 떠오른다. 날렵해진 콧날 좀 떠올려봐. 입던 옷을 싹 버렸다 하셨잖아. 사람들이 다 못 알아본다 자랑하셨었는데. '이렇게 참고 있는 나를 버린다고?' 아우성인 야식 고픈 허기를 외면한다. 샷을 내린다. 그래 시작이다. (오늘밤 파 닭꼬치까지만 먹고?)



 

 물이 반만 들어간 아메리카노, 얼음을 많이 넣은 아메리카노, 샷을 1/2 넣은 아메리카노, 얼음을 3개 넣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물보다 샷을 먼저 담는 아메리카노, 얼음은 적게 물은 두배로 넣는 아메리카노, 시럽을 넣는 아메리카노, 좀 더 긴 시간 추출해야 하는 아메리카노, 컵홀더를 쓰지 않는 아메리카노, 텀블러에 담는 아메리카노. 각각 다른 시작이기에 모두 다른 아메리카노.

 오늘의 시작이 살짝 틀어지는 아메리카노가 전해질까 걱정되어, 달리는 버스에서 컵라면 먹듯 점심 겸 저녁을 황급히 삼키는 사장이다. 나는.

 

오후 업무의 시작. 아메리카노.



 

"OO 씨, 뭐 마실래? 비싼 거 시켜.", "저 아메리카노요.", "에이 내가 사는 거야. 좋아하는 걸로 먹어.", "저 아메리카노 좋아해요." 아메리카노는 사회생활의 시작이기도 하다.


"시작의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시는 고객님께 응원의 아메리카노를 전합니다."




이전 07화 샤넬은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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