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커플의 가위바위보 틈에서 망고 스무디를 만드는 나는, 시청자가 되어 또 간지럼을 느낀다. (파란 셔츠 교복을 입은 남자 주인공은 어떤 걸 냈을까요? 맞습니다. 반전은 없어요. '보자기'입니다.) 마음으로 답글을 단다. '저 이 문장 좀 빌릴게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덧니 귀여운 여자친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남자친구를 바라본다.
"우리~ 지금 말고 이따 학원 끝나고 앉아서 먹고 갈깡?"
친구들과 올 때는 장난도 많고 과격하던 큰 체격의 남자친구가 아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래?('그'를 발음할 때는 고개를 살짝 내리며 눈을 크게 뜨고 '래'는 고음을 노래하듯 가성을 담아 살짝 던져야 한다. 활짝 웃으며. ) 지금 먹고 싶어? 알겠떠. 그럼 지금 사 가장."
보는 나도 아찔하도록 사랑스럽다.
'그랭', '알겠떠' 토핑을 살짝 뿌린다 한들 로봇 남편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화를 잠재우는 효과는 좀 있는 것 같다.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화를 다스려야 발화 가능한 음조이기 때문일까.
귀여운 여자친구가 귀여운 선물을. 거절하려 하니 "각각 맛이 다 달라요. 꼭 드셔야 해요옹." 한다. 앗 귀여웡.
한 번은 술기운에 말씀이 많아지신 고객님께 여쭈어 보았다. 어떻게 두 아드님을 특별하게 키우셨는지. 사춘기 입구의 아이들과 티격태격하다 보니 남다른 길로 성장한 아드님 두 분을 키운 이야기가 궁금했다. 바르게 성실하게 자라기까지 방황이 없었을까. 고객님께서는 머뭇거림 없이 답하셨다.
"부모는요. 자식이 하고자 하는 바를 무조건 지원해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아" 소리 뒤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로서의 내가 회초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아이가 무얼 하고자 하면 일단 걱정부터 하고 잔소리도 하고. 아이코. 사춘기를 들먹일 것이 아니라 들썩이는 내 마음부터 '너 이리 와봐' 해야겠구나. 고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시고 멜론 버블티와 함께 퇴장하셨다.
"해봐라 지원해 주고 부모는 본인 인생을 열심히 살면 됩니다. 그럼 됩니다. 배워요."
커버린 외동아들이 여자친구와 나들이 갔다 하시며 아버님께서 들르신다. "그 녀석은 얼굴도 보기 힘들어. 우리 애가 이거 먹지요?" 아들이 비운 방의 적적함을 아들이 좋아하는 초코 버블티로 채우시려는 것일까. 초코를 전했지만 여전히 카운터 앞에 계신다. 가게를 둘러보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신다. 아 음료로만 해소되는 갈증이 아니었나. 목마름을 닮은 허전함에는 칭찬이 최고다. "잠깐 봐도 얼마나 예의 바른지 몰라요. 얼굴도 점점 멋있어지고. 대학교 가면 학교가 뒤집히겠어요." 초코버블티 위로 띄운 아드님 칭찬에 드디어 웃으신다. "아이고 그 자식이 무슨. 얼굴이 제일 문제지!" 더 이상 목이 타지 않으신지 촉촉한 미소와 함께 돌아서신다. 며칠뒤 얼굴이 문제라기에는 너무 잘생긴 아드님이 들러 부모님 즐기시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주문한다.
"우리 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 이것만 먹어." 오로지 바닐라 마카롱만 드신다는 사모님을 위해 한 박스씩 사가시는 어르신의 미소 버튼도 아들이다. 할머니 병환 이야기에 마른 눈이 더 깊어지실 때, 1년 전쯤 신도시에 맥주집을 시작한 아드님 안부를 여쭙는다. 금세 촉촉한 아빠눈을 보이신다. 잠도 안 자고 그렇게 성실히 일한다고. 손님이 줄을 서서 자꾸 늦게 퇴근한다 염려하시지만 여전히 함박미소 중이시다. 어르신께서는 내 또래 아드님을 종종 '아가'라 부르신다. 돈을 내고 사가시면서도 '고마워서' 하시며 홍삼 캔디 올려두시는 모습에 40대 아가의 가게에 줄이 생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머님께서 늘 상냥히 전화를 받으시지만 유독 '응~ 며느리~', '오호 그래그래!' 하실 때가 있다. 곁에 누군가와 함께이신 것이다. 조금 자랑도 하면 좋겠는 사이인 누군가. 초코 고객님, 마카롱 어르신 미소를 떠올리며 어머님의 아들 소식을 전한다. "요즘 회사에서 시험 본다고 공부하는데 어머님 닮아 뭐든 열심히 하잖아요. 지난번 영어시험도 또 1등급 나왔어요!" 밤까지 목마르지 않으실 어머님을 떠올리며 뿌듯하다.
아빠가 가끔 친구분들 자식 근황을 전하실 때 아빠가 자랑할 내 이야기는 뭐 있을까 짚어본다. 아 길게 쓸 것이 없구나. 결론은 '더 열심히 살아야지'이다. 늘 그렇듯.
어린이 고객님과의 스몰토크에서 엄마로서의 내 자리를 돌아보기도 한다.
매년 엄마께서 본인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도시락을 만들어 주신다는 아가. 올해의 선택은 산리오 캐릭터였단다. 인터넷 도안 보고 재료를 산더미만큼 준비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무엇이든 아이가 원하는 그림대로 척척 만들어주신다는 어머님 이야기에 놀라며 말했다. "와 OO 엄마께서 가게 하시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주문하겠어요!"그러자 신나게 자랑하던 아이가 갑자기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요 그건. 그럼 엄마가 집에 없잖아요."
조금 전 단체 주문 시간 맞춘다고 "엄마 지금 바빠서! 금방 걸게!" 하고 끊었던 준우 전화가 생각난다. 집에 없는 엄마이지만 마음에는 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든다. "준우 아까 미안! 오늘 재미있었어? 아 연극 발표 조를 다시 짰어? 와 좋은 친구들이네~ 에이 긴장 안 해도 돼. 재미있게 하면 되지! 아 동건이랑? 그래. 대신 점퍼 꼭 입어야 해. 저녁에 추워. 야시장 갈 거면 가게 와서 돈 가지고 가~ 응 그래. 이따 와~"
흑당 버블티를 마시던 어린이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우리 엄마는 국가 대표야. 네이버에 엄마 이름 쓰면 사진이 나와."
"우리 엄마는...... 응......"
답을 기다리는 아가와 답을 찾는 아가 사이의 말줄임표. 쓰러진 책을 정리하러 간다. 그리고 말한다.
"OO 엄마는 그림을 엄청 잘 그리시잖아. OO이 엄마도 진짜 멋지시고 OO이 엄마도 정말 대단한 분이시고~ 아줌마는 두 분 다 최고 부러워!!"
시현이도 종종 친구와 '우리 엄마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전하곤 한다. 어떤 내용이 오가든 아이 마음 서운하지 않은 수식어의 엄마이고 싶다.
작은 가게에 서기 이전에는 '아이가 해야 할 일', '아이가 지녀야 할 모습', '아이가 도착할 자리'처럼 아이가 주어인 걱정을 하곤 했다. 이제는 다르다. 시현이와 준우는 내가 보여준 것 이상의 몫을 해내고 있다. '엄마의 꿈', '엄마의 매일', ' 엄마의 언행', '엄마의 생각' 나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면 아이도 스스로의 삶을 고민하리라 믿는다. 아이의 노력을 묻기 전 나의 노력부터 돌아보라고 작은 가게 고객님들께서는 내게 말씀하신다.
'속담 넣어 편지 쓰기'라며...... CEO가 꿈이지만 '놀기는 바삐 공부는 천천히'가 신조인 나의 준우.
마감 청소를 도와준다고 남편이 왔기에 빌려둔 여주인공 대사를 읊는다. "우리 가위바위보 해보자. 나는 가위 낼게!" 여주인공의 미모와 애교까지는 흉내 내지 못한 탓인지 이마가 넓고 탁구에 빠져 있으며 데이터베이스 관리자인 남편은 '당연히' 주먹을 낸다. '그럼 그렇지 보자기를 낼 리 없지' 싶었으나 그래도 가위바위보의 사연을 전하며 함께 웃었으니 되었다. (승부욕 생긴 남편은 지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다시 하자 했다. 에이 이제 내는 보자기는 시시하다고.)
18년(하필 숫자가......) 넘도록 INFP를 예상하지 못하는 ISTJ에게 실망하지 않고 미리 힌트를 줄 것이다. 나는 가위를 낼 거라고. 자식 자랑에 행복한 고객님들의 미소를 나도 부모님께 선물할 것이다. 비록 큰돈은 드리지 못한다 해도. 사춘기와 갱년기의 본격 충돌에 대비하여 내 몸과 마음을 먼저 단단히 채비할 것이다. 아이에게 '그러는 엄마는!' 공격을 받지 않도록.
작은 가게 고객님 말씀에서, 아내로서 자식으로서 엄마로서의 나를 생각한다. 사랑은 '너'를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보는 일임을 배운다. '가게 아니었으면 나는 어떤 40대였을까' 쯧 소리 한번 내며 감사한 가게를 구석구석 닦는다. 또 빠져든다 이 작은 공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