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일 + 1.5개월 + 3개월의 법칙
이제 4년 차가 되었지만, 연차에 비해 이직을 많이 한 편이고 그만큼 여러 조직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바뀌기도 했고 계열사가 바뀌기도 했으며 팀이 바뀌기도 했다. 변화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편에 오히려 즐기는 성향도 있어서 여러 시도를 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빠른 적응이 있었다.
내가 5년 뒤 그리고 10년 뒤에는 저렇게 조직에서 인정받고 제품의 방향성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PM 한 분과 PO 한 분이 있다. 그중 한 분이 말씀 주셨던, 조직에서 처음 적응하는 규칙 중 '2주일 + 1.5개월 + 3개월의 법칙'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 규칙을 듣고 보니, 나도 본능적으로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간을 쪼개서 활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규칙이 어떤 규칙이고, 조직에서 빠르게 적응해 나감과 동시에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 신뢰를 얻으면 이후에 일하는 것이 쉬워질 수밖에 없다.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저 사람이 판단을 하는 것은 대부분 맞을 거야"라고 생각하게 한다거나, 한 번 정도 틀리더라도 "그래도 저 사람이 다음번에는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반응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신뢰를 얻으면 이후에 협업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혼자 일할 수 없는 직무인 만큼 여러 이해 관계자들에게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지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도메인 자체가 너무 낯설고 잘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빠르게 내가 잘 해낼 수 있는지를 많이 고민했다.
예를 들어, 지금이야 오프라인 결제 시장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VAN과 PG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지식이 없는 상태였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하나의 VAN사당 수 십장에 달하는 문서들을 다 읽었다. 모든 커맨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각 커맨드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파악했다. 또, 맡게 될 역할이 많았기 때문에 그동안 업무 진행을 위해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오갔는지나 어떤 맥락으로 멈추거나 진행되었는지 등을 파악하면서 물어보고 또 물어보았다. 몇 개월치 슬랙과 노션 문서를 정독하고 나만의 언어로 정리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보였던 것 같다.
초반에 적극적이었던 그 모습에 대한 평가는 퇴사할 때 알 수 있었다. 커피챗을 하면서 함께 일했던 팀원 분들이 말씀주시 길, 그분들이 기억하는 나는 "적극적이고, 잘 모르더라도 어떻게든 해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덕분에 일을 할 때도 좀 더 내가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높여주시기도 했고, 일할 때 큰 충돌 없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
첫 2주일은 바뀐 조직에서 적응하기에 가장 골든 타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일을 바로 시키는 기간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작은 기여를 만들어내는 것을 추천한다.
큰 기여는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동안의 문서를 꼼꼼하게 본다거나, 일하는 프로세스에서 불편한 점이 무엇인지 발견해 내는 것도 충분하다. 이러한 히스토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온보딩을 해주는 것 외에 더 많은 질문을 하고, 함께 협업하는 분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 좋다.
이 시기에 나는 팀이 새로 세팅되는 단계여서, 워크스페이스를 다듬었다. 산재되어 있던 여러 문서들을 빠르게 찾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고 바로 참고할 수 있도록 시각화했다. 팀의 목표나 팀이 현재 하고 있는 업무들의 프로세스가 더 잘 보이도록 배치했다. 협업이 정말 많은 팀이었고 병행해서 진행되는 업무가 엄청나게 많은 팀이었기에, 이 문서는 이후 타 팀과 협업할 때도 커뮤니케이션의 기준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5개월이 되었을 때는 내가 맡은 역할에서 작은 성공 혹은 좀 더 큰 기여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크게 뭔가 이뤄낼 수 있어도 좋지만 온보딩 후 첫 업무를 맡은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일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권한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맡은 역할에서 잘 해내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강점을 잘 녹여내서 보여주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나의 경우에는 나름의 방식으로 PON (= Problem, Opportunity, Solution)을 정리했다. 외부인이 조직에 들어올 때 하나의 무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신선한 시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제품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나, 경쟁사가 가지고 있는 강점은 무엇인지나, 어떤 식으로 개선시키면 좋을지 등에 대해서 정리해서 공유했다.
중요한 것은, 작은 기여에서 시작해서 업무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해내고, 적어도 팀원들이 "오, 저 사람은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이고 실제로 뭔가 좋아지게 만들었는데?"라는 평가를 할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1.5개월을 보냈다면, 3개월 차가 되었을 때는 주어진 업무 외에 무언가를 제안하고 달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다. 그렇다고 마찬가지로 큰 것을 해낼 필요는 없다.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면서 조직이 겪고 있는, 하지만 해결하기에는 여유가 없는 무언가를 해결해 내면 좋다.
그 외에 가능한 기여는 조직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스터디를 한다거나, 전사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가이드를 만든다거나, 업무 효율을 증가시켜 줄 수 있는 슬랙봇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크지 않다. 하지만, 달성해 낸다면 팀원들이 "덕분에"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얻은 신뢰는 쉽게 깨지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조직에 가서든 만들어내고 싶은 강점이자,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적극성과 구조화"라고 생각한다. 그 모습을 3단계에 걸쳐서 만들었기에, 조직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조직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직의 특징이나 분위기에 너무 맞지 않는 수준으로 무언가 해내려고 한다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다. 조직의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그 조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나 해야 할 것의 딱 120% 정도를 해보자. 처음 팀에 온보딩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적응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