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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Sep 29. 2022

베러레터 #04. 기념일을 비건으로 보내기

생일을 비건으로 보내보기로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베러테이블의 토토예요. 


베러레터는 네 번째인데 초래님과 번갈아 쓰다 보니 무척 오랜만인 느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여름에서 가을로 한 계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낮에는 무더운 요즘이에요. 한창 해가 나는 낮 시간에는 ‘가을 맞아?’ 싶다가도 저녁 먹기도 전에 지는 해, 소매에 감도는 선선한 바람, 초록 잎들 사이사이 노랗게 바랜 잎들 덕에 가을을 통과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가을을 감각하며 자연스레 올해의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게 됐어요. 연초에 세웠던 목표들을 돌아보며 남은 한 해 동안 할 수 있는 것들과 해야 하는 것들을 점검하고, 캘린더를 뒤적이며 친구들과의 약속이나 이벤트를 체크하기도 하고요. 각종 기념일과 약속들을 어림잡다 보니 자연스레 이번 레터의 주제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이번 레터에서는 ‘기념일을 비건으로 보내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기념일’하면 가장 먼저 어떤 날이 떠오르시나요? 생일이나 가족, 연인과의 기념일을 떠올리는 분도 계실 테고, 빨간날을 고대하는 직장인 분들이라면 개천절과 한글날이 있는 10월을 기대하고 계실 수도 있겠네요. ‘축하하거나 기릴 만한 일이 있을 때 해마다 그 일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기념일의 정의만큼이나 좁거나 넓은 의미의 다양한 기념일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문득,  기념일을 보내는 풍경이나 방식도 기념일의 스펙트럼만큼이나 다양한가?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무언가를 축하하고 기린다고 할 때 가장 쉽게 동원되는 방식은 맛있고 좋은 걸 먹거나 선물을 주고받는 식인데, 그때 먹는 음식이나 주고받는 선물이 정형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느껴요. 


축하할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 고기를 먹는 것은 아주 매끄럽게 이어지는 흐름이죠. 기념일과 스테이크, 생일과 소고기 미역국, 크리스마스와 칠면조 구이, 명절 선물인 한우세트… 축하하거나 기리는 대상도, 기념일의 의미도 모두 다른 ‘좋은 날’이지만 기념일을 채우는 ‘좋은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물한 제품 2위가 ‘소고기 세트’라는 점도 의미심장하죠. 1위가 ‘명품 비타민’, 3위가 ‘홍삼’이라는 걸로 미루어 보아 축하할 일이 있거나 성의를 표시하고 싶을 때 비타민이나 홍삼만큼이나 ‘좋은 것’이라는 함의를 가진 선물이라는 것이니까요. 특히 소고기는 어떤 ‘성공’의 이미지까지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이 기념일과 육식의 견고한 메커니즘이 가장 극대화되는 날이 ‘복날’입니다. 여기엔 물론 오래 이어져온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있어요. 복날은 계절과 날씨의 변화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더운 시기에 기력 보충을 위해 보양식을 먹는 날이었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오늘, ‘복날’의 맥락은 사라지고 ‘복날의 이미지’만 남아 온 세상이 삼계탕을 먹어야만 하는 것처럼 종용합니다. 도심에서 사는 사람들도 무더위는 힘겨울 테지만 왜 무더위가 점점 심해지는지, 복날이 아닌 보통날에 이미 얼마나 많은 육식이 소비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기념일=소고기라는 견고한 사회적 맥락과 그를 매끄럽게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의 결속 사이에서 비거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나마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채식이 떠오르고, 최근엔 복날에 무비판적으로 육식을 소비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양식의 의미를 다시 쓰려는 시도들이 체감될 때도 있어요. ‘비건으로 복날 보내기’와 같은 메세지를 시작으로 그렇게 조금씩 균열을 낼 수 있다면, 차근차근 더 많은 기념일들을 비건으로 바꾸어본다면 어떨까요.


특히, 나에게 주도권이 있는 기념일인 ‘생일’은 비건으로 보내기 참 좋은 날입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생일만큼은 모두가 나에게 너그러워질 테니 생일 축하 자리를 비건으로 갖자고 해보는 거예요. 더군다나 ‘생일’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볼 때 비건으로 보내 마땅한 날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에 다른 존재의 죽음을 빌려 축하하는 것은 좀 이상하니까요. 생일은 나의 탄생을 축하하는 한편, 그동안 빚진 생명들을 기릴 수 있는 날이기도 한 것이죠.


저는 작년 생일부터 생일을 비건으로 보내겠다고 다짐했어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기념일과 육식 소비의 거대한 결속을 끊어보겠다!’ 하는 비장한 마음은 아니었고, 그저 저의 탄생을 다른 존재들의 죽음을 빌려 축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일을 비건으로 보내겠다고 이야기 했을 때, 저의 비건 지향 생활을 이해해주는 가족들은 표고버섯 미역국과 비건 케이크를 준비해주었어요. 동생과는 ‘순대 없는 순대볶음’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미역국도 케이크도, 순대 없는 순대볶음도 모두 맛있었고, 무해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기쁘고 감사했어요.


올해 생일에는 가족들이 모두 바쁜 시기라서 비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어요. 그럼에도 엄마께선 감자미역국을 해주셨습니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의 감자 미역국은 표고 미역국과 또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생일 케이크는 홀케이크를 사면 불필요하게 남을 것 같아 조각 케이크로 대체하기로 했어요. 비건으로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며 요리조리 무해한 생일을 보내기 위해 궁리하다 보니 앞으로의 생일들도 기대되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비슷한 풍경의 기념일이 지겨우시다면, 모든 존재에게 무해한 기념일을 만드는데에 동참하고 싶으시다면 생일을 비건으로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떠세요? 마음껏 기쁘게 누릴 수 있는 날이 될 거에요. 


앞으로의 무해한 기념일들이 기다려지는

토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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