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생존 사이에서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심장이 요동쳤다.
오랜 침묵 속에서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열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그가 내게 말하지 않았던 진실,
그의 힘과 두려움, 숨겨진 고독이
무거운 공기처럼 방 안을 채운다.
그가 두 번이나 거짓을 말하고
나를 멀리하려 했던 이유가
이제야 드러난다.
그의 침묵은 방어였고,
자기를 지키려는 힘겨루기였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붙잡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내 마음의 중심은 나에게 있었고,
내 가치는 그의 입맞춤 하나로 흔들리지 않았다.
"내 힘은.. 머리카락에 있어.
나실인의 서약이 끊어지면, 나는 누구보다 약해진대..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약함을 안 적도, 느껴본 적도 없어"
그 순간, 내 손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그러나 운명을 향해 풀려나듯 흘러내렸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이제는 힘의 근원, 그의 자존심, 그의 비밀이 내 손에 있구나.
그토록 강하던 남자가
내 무릎 위에서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은
지금까지 없던 유일한 사랑처럼 보였고, 동시에 끝처럼 보였다.
그는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제, 나는 선택해야 한다.
그를 처단할 순간, 나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아픔을 되갚아줄 순간,
무엇보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선택..? 선택이라니.. 답은 하나인데..
내가 잊은 무언가가 남아있던가?
아니,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살 길은 이것뿐.
그날 밤, 기척을 죽인 블레셋 사람들이
내가 준 신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든 것은 칼도, 창도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의 손에 든 가위 하나만 반짝일 뿐이었다.
철이 머리카락을 가르는 소리가
숨소리보다 먼저 들렸다.
촉-
긴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
그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나를 찾았고, 나를 안았다.
드디어 그의 힘이 다 빠져나가고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는 나를 놓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치 자기 잘못이라는 듯이..
그렇게 그의 힘이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이 삼손을 끌고 나갈 때
그는 비틀거렸고, 저항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당겨 그의 옷을 찢었고, 그의 머리카락을 기념품처럼 나눠가졌다.
그에게 침을 뱉고 그를 조롱했다.
한 남자가 영웅에서 죄수로 변하는 모습을 나는 숨소리 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끌려갔고,
나는 남겨졌다.
나는 살기 위해 그를 넘겼고,
그는 사랑을 믿다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문 밖으로 들린다.
"저 여자 보통이 아니네. 어떻게 삼손을 무너뜨렸대?"
아무도 말하지 않겠지..
그녀는 끝내 살아남았다고.. 결국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