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생존의 경계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것
나는 전쟁에 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가 흘러내리던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 소렉 골짜기에서 나고 자랐다.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다.
심지어 그는 적국의 영웅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가 처음 내게 다가왔을 때, 그의 애정은 사랑이라 불리기엔 너무 권력적이었다.
힘 있는 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선택적 애정’
언제든 거두어갈 수 있고, 그의 기분에 따라 바뀌는 권력이었다.
나는 그 사랑에 온전히 기대어 살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사랑으로 살지 못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와 결혼하기로 한 이상,
나는 나를 증명해 내야 했다.
네가 힘이 세다고? 그렇지 않아. 진짜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네가 나를 택했다고? 아니야 나는 복수를 위해 잠시 후퇴했을 뿐이야.
삼손은 자주 내 곁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나를 자신의 운명에 들이지는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배신으로 잃은 첫사랑의 그림자가 있었고,
그는 자신에게 힘이 없다면 아무도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굳건한 방어막을 세웠다.
삼손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안에는 내가 들어갈 문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그가 두 번 거짓을 말했을 때, 나는 그것을 '문을 닫는 행위'로 느꼈다.
나에게는 사랑의 거절이자 존재의 부정이었다.
삼손을 만나기 전, 나는 누구였을까?
빼어난 외모와 말솜씨로 나는 누구에게나 주목받았었던 나이지만 그 안에 내가 있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모두가 나를 평가했다.
전쟁의 무기처럼 여겨진 남자들 사이에, 나는 어쩌다 태어난 예쁜 아이.
보여주기 위한 아이였을 뿐이다.
"너는 요리를 못하지만.. 힘이 없지만.. 그래 너는 예쁘니까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언제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검증받아야 했다.
삼손 나는 결코 당신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야.
당신이 나를 향해 닫아 둔 그 문, 그 문을 내가 부숴버릴 것이야.
우리가 같은 자리에서 숨을 쉬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해도
우리는 결코 같은 세계에 속한 적이 없어.
너는 나를 안았지만,
나는 네 안에서 안전해 본 적이 없었다.
너는 네 힘으로 세상을 움직였지만
나는 그 힘에 깔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살아남아야 했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들릴라는 악녀였고, 삼손을 배신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사랑보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를 배신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말없이 끌려가던 순간,
그의 눈동자가 원망이 아닌 연민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내 손을 조용히 놓는 그 순간,
그를 유혹하지 못하면 나 또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리던 나를 조용히 안아주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는 알았고, 두려웠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나 대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사랑을 알았다.
내가 삼손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했던 것은 미움이었을까?
나는 정의를 말하며 살았다. 내 속에는 거대한 칼이 있었다.
너는 원수였고, 나는 복수를 위해 행동했다.
너는 옳지 않았고, 나는 옳았다.
너는 우리의 땅을 망쳐놓았고, 많은 사람을 죽였어.
정의가 필요했고, 나는 그 정의를 휘둘렀을 뿐이야.
하지만, 이제 돌아보면, 내가 칼을 숨기고 너에게 다가갔던 과정은
'아무도 나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존재 증명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정말 정의였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채울 수 없던 결핍의 다른 얼굴이었을까..
이제 너를 보내고 남겨진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을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너는 너의 전부를 내게 주었고,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전쟁의 두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 안전을 원했다.
거대한 적국을 물리친 용사이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게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로 원했었던 것은
칼도 아니요. 힘도 아니요.
사랑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