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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김나영 Apr 27. 2021

24 <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

우리는 누구나 엄마라는 존재를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엄마라는 존재는 결코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간절한 동경의 대상입니다.

엄마에게는 독특한 향기가 있고 본능적인 이끌림이 있으며 알 수 없는 애틋함이 있습니다.


어릴 적, 엄마에게 매달릴 때면 언제나 코끝을 스치던 은은한 그 향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엄마가 옅게 바른 화장품에서 나는 좋은 냄새였습니다.

엄마를 안으면 항상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엄마의 환한 미소는 한 겨울의 눈도 녹일 만큼 따뜻한 온기로 나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 오곤 했습니다.


아이 때에, 한참을 달게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불안한 마음에 엉엉 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보이며 엄마가 나타나면 그 얼마나 반갑고 안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그리고 싶습니다.

 아이는 엄마와 눈을 맞추고 육체적 포만감은 물론 정신적인 포만감까지 함께 느끼며,

배가 불러도 엄마 젖에 매달려 세상의 그 어떤 근심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의 미소를 가득 담고 행복에 겨워합니다.

바라만 보아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이를 엄마도 행복하게 내려다봅니다. 

나는 정겨운 그 모습 속에서 천국이 느껴집니다.

천국에는 바로 그런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엄마-라는 말은 천만번을 부르고 또 불러도 정감 있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라는 말입니다.

아이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입을 오므렸다가 벌리면서 나는 소리를 저절로 깨달아서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아기들이 엄마를 부르는 말의 발음이 거의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엄마와 아이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본능적으로도 아주 가깝게 밀착된 관계입니다.


엄마의 품을 느껴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정서적 안정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서의 결핍 속에서 자란 사람은 포근함이나 사랑의 깊이를 잘 알지 못해서 차갑고 건조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정신 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아이가 엄마 젖을 빨면서 일차적인 자아가 완성된다고 하며 그 시기를 구순기(口脣期)라고 했습니다.

성적인 본능이 그 시기에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본능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충분히 해소되어야만 올바른 자아가 형성된다고 한 것입니다.

나 역시도 그때의 시기가 성격 형성에 중요한 시기라고 보지만,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구순 기적 본능의 해소 때문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동안의 포만감과 정서적 안정감이 아이의 뇌 속에 긍정적인 정보체계를 인식시킴으로써,

원만한 성격과 건전한 사고방식을 지닌 올바른 아이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젖을 물리기만 했다고 해서, 또 아이의 빨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를 해소했다고만 해서 아이의 성격이 올바르게 형성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젖을 물린 엄마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지 못한 상태라면 아이는 엄마의 불안정안 마음을 그대로 전해받고 아이 역시 불안정한 아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엄마에게서 젖을 먹고 자란 아이만이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고 맑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엄마의 젖을 먹으며 자란 아이가 똑같이 맑을 것입니다. 엄마의 성격이 먼저 안정된 상태라야 아이의 성격도 여러 면에서 안정적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교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 본능의 작용을 훨씬 능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날개 밑을 벗어나 훨훨 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엄마의 그늘은 언제나 알게 모르게 우리의 쉼터가 되어 주고 우리의 모든 것을 끌어안아 줄 마지막 고향이며 힘겨울 때 피신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엄마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그토록 큰 위안을 주고 행복한 그리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엄마의 모태에서 자라고 태어나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을 해결해주고 보호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엄마를 찾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엄마라는 존재가 우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대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의 생명에 어떤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엄마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엄마를 의존하며 동경을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나는 엄마처럼 평안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큰 그리움과 동경이 되는 존재가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엄마에게 느끼던 그리움과 안온함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만,

우리의 생명이 있게 한 보다 근원적인 모태가 되어준 하늘과 대지와 우주의 大생명력이 바로 그 큰 그리움과 동경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도 바로 그곳이기에 진정으로 영원한 안식은 결국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엄마에게 그 어떤 투정을 부려도 웃으며 다 받아주듯이 하늘, 혹은 하느님-나는 종교적 의미를 제외하고라도 하늘과 하느님은 같은 존재에 대한 다른 언어적 표현이라 여깁니다- 은 우리의 원망까지도 모두 알고 오로지 한 결 같이 자비로운 사랑으로 대할 뿐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무한히 사랑하듯 하늘도 우리를 무한히 사랑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항상 대기 상태로 있어줍니다.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사랑스러운 아이처럼 하늘의 뜻을 잘 헤아려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늘이 주는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기에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의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고 평화를 느끼듯, 하느님이 만드신 우주의 신비 속에 나를 온전히 맡기고, 우주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큰 에너지를 느낍니다. 

그동안 내가 알던 하느님은 나의 작은 사고체계 속에서 내 맘대로 만들어 놓은 너무도 왜소하고 작은 분이었으며,

실제의 하느님은 그보다 훨씬 크고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우주와 내가 하나로 합일을 이루게 되면 나 자신도 훨씬 크고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마음에 하늘의 마음이 담겨 있으면 나는 저절로 큰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엄마에게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아이처럼 하늘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바로 나의 모태이고 고향이며 돌아갈 곳임을 알고 자꾸만 친근함을 쌓아가야 합니다. 하늘 무서운 줄도 알고, 또 하늘이 고마운 줄도 알며 하늘의 뜻에 따라 우주의 모든 피조물이 지니는 이치에 따라 순응한다면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고 하늘과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상병 시인은 그 유명한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통해 잠시 소풍 왔던 인생으로부터 영원한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해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가 바라던 대로 그는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하늘임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면 죽음이라는 것조차도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닌 게 될 것입니다.

엄마처럼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가만히 생각하면 잔잔한 마음과 함께 따사로움마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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