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노예가 되지 말자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함께 놀던 친한 동무에게 어느 날, 간밤에 꾸었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고 났더니 그 동무가 대뜸, 한다는 말이 거짓말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꿈은 어른들만 꾸는 것이고 자기는 그동안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누군가가 하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듯이 그 친구 역시 어린 마음에 나를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만 것입니다.
지금이야 이해가 되고도 남을 일이지만 그때는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그 친구가 더욱 신기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어린 시절 유난히 예민하고 허약한 체질이라 꿈도 자주 꾸었고 심지어 가위에 눌리는 경험도 많이 했던 나로서는, 꿈을 꾼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그 친구가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조금 더 커서 그 일을 생각하며 얻어낸 결론은, 그 친구는 꿈을 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자신이 밤사이에 꾸었던 꿈에 대한 기억을 한 순간에 모두 날려버렸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나름대로의 꿈에 대한 상식을 보태어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성격도 무딘 편이었고 낮 동안 아무 걱정도 없이 맘껏 뛰놀다가 지쳐서 잠을 이루었기 때문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꿈이 꾸어지는 수면시간대를 지나서 잠에서 깨었기 때문에 꿈에 대한 기억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친구는 꿈도 꾸지 않는다고 여기며 자랄 만큼, 단순하게 생각하고 건강하게 행동했으며 놀이를 할 때에도 항상 느긋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친구도 조금 더 크면서는 꿈도 꾸고 가위에도 눌려보고 했을 것입니다.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꿈을 꾸게 되는 것일까. 하고 많은 관심이 생겨났던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어느 공상 과학책에서, 꿈을 먹는 요정이 인간에게 꿈을 꾸게 하고는 그 꿈을 삼킴으로써 서서히 영혼을 빼앗아간다는 것을 읽고는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신의 <꿈의 해석>이라는 저서를 통해, <꿈의 해석은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노예> 임을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가 꿈으로 반영된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어쩌지 못한 다는 이유로 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최근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꿈에 대한 연구를 했고 그 결과 신비에 가깝던 꿈에 대한 베일이 하나둘씩 벗겨지면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꿈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점까지 왔는데도 아직까지도 우리는 꿈에 대해 이런저런 해몽을 하려들 때가 많습니다. 좋은 꿈인가 아닌가를 구분지어서는 그날의 운을 점을 치려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며 안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좋은 꿈을 꾸었다 싶으면 당장 달려가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하는 것은 누가 규정지은 것일까요. 그것은 이전의 시대를 산 사람들이 통계적 결과를 조사해서 해몽해 놓은 것을 토대로 하여, 비슷한 꿈을 꾸면 같은 관점으로 해몽을 하는 것일 뿐이지 그 어떤 근거도 일백 프로 확실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야말로 耳懸鈴鼻懸鈴(이 현령, 비 현령-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적인 해석에 의존한 어리석은 발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건대 기분이 좋게 여겨지면 좋은 꿈이고 힘이 들었거나 불쾌함이 느껴지면 나쁜 꿈이라고 여겨지는 것으로써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개꿈을 굳이 좋은 꿈과 나쁜 꿈으로 구분 짓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구한 지난 세월 동안 인간은 꿈을 해석해 왔고 꿈을 통해 이런저런 예측을 하기도 하고, 예술가들이 꿈을 통해 어떤 영감을 받기도 해왔음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꿈을 해석하는 일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도외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자신이 꾼 꿈을 가지고 예언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고, 그 예언이 맞아떨어진 적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예민하고 영감이 많이 발달한 사람들은 그들의 꿈이 예사롭지 않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
꿈이라는 것이 다만 정신세계의 영역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이고 영적인 세계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영험한 예보자 역할을 해주는 꿈을 통해 안 좋은 일은 미리 예방하고 좋은 일은 적극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나 역시도 완전히 무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특별히 영적인 존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꿈 때문에 무작정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무수히 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의 내용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릴 때에는 어른들의 말대로 한창 키가 크느라고 그랬는지 여기저기를 모험하듯 돌아다니며 날아오르기도 하고 낭떠러지로 뚝, 떨어지기도 하는 스토리 중심이 아닌 스릴감이 넘치는 행동중심의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원기가 충천한 어린아이다운 꿈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점점 생각이 많아지면서 평소에 나의 마음을 주로 사로잡고 있던 것들이 꿈으로 반영될 때가 많았습니다.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는 그것을 꿈속에서 이루기도 하고 혹은 실패감에 괴로워하다가 깬 적도 있고, 공포영화를 보고 난 후,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을 때엔 당장이 아니더라도 무의식에 숨겨져 있던 그 공포가 언젠가는 반드시 악몽으로 꾸어져 식은땀을 흘릴 만큼 그 꿈이라는 것으로부터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 때문인지 그들이 죽고 난 후에도 오랜동안 일정한 간격을 두고 꿈에 나타나 때로는 반가움을 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나를 잡아가려는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나 그동안의 정이 한 순간에 끊겨버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마음에서 지웠건 아니면 시간이 흘러 저절로 망각이 된 것이건 더 이상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게 된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꿈에서도 전혀 나타나질 않게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꿈에 자주 보였던 것은 그들이 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나의 주변을 맴돌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무의식에 그들을 새겨 넣고 그들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내가 늘, 어떤 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긴장해야 하는 일은 꿈속에서도 항상 곤란한 상황이 되거나 어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여 난감하고 쩔쩔매게 합니다. 그런 꿈을 꾸고 났을 때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학교 다닐 때도 유난히 싫어했던 수학 문제가 꿈에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아 고민하다가 잠을 깨었는데, 내가 이미 졸업을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토록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연주회를 앞두고 몹시도 긴장했던 시기에는 꿈을 꿀 때마다 피아노를 치려하면 피아노가 자꾸만 내게서 멀어져만 간다거나 오르간이 갑자기 고장이 난다거나 하는 등의 당황스럽고 낭패스러운 꿈을 꾸어, 불안한 마음에 연습이나 준비하는 일에 더욱 완벽을 기하게 되곤 했습니다.
꿈이 항상 미래의 사건을 예시하기 위해 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까지 말한 바대로 꿈은 의식적이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것들이 쌓이고 또 쌓여 있다가 더 이상 쌓아두기가 버거워지면 그것을 해소시키기 위해 꿈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쌓아두게 되는 무수한 정보가 우리의 뇌 속에 가만히 저장되어버리기만 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들판을 달리며 사냥을 하는 꿈을 꾸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맹수와 싸우는 꿈이야 말로 악몽이었을 것이며, 주술사들이 꿈에 나타나 하는 말을 두려워하며 믿으려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의 사건이나 사물을 꿈에 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즉, 원시인들은 우리처럼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꿈을 꾸고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들의 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된 어떤 것들에 한해서 꾸어진 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자리하는 자신만의 간절한 바람이나, 억압과 공포가 꿈으로 펼쳐지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무의식 중에 자신이 만들어서 꾼 꿈으로 인해 또다시 두려움을 느끼거나 길흉을 해몽하려 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알고부터는 더 이상 나쁜 꿈에 대해 연연하지 않기로 했으며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간절하게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의식적으로 많이 생각해서 무의식에 저장이 되도록 하고는 꿈에서 그를 만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은 효과 만점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일이 있을 때에도 이미 그것을 이루었을 때의 모습을 자꾸만 의식적으로 마음에 새기고는 꿈에서도 내가 의도하는 대로 펼쳐지게 함으로써, 깨고 나면 그것에 대한 더욱 강한 확신과 염원을 지니게 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매진할 수 있는 더 큰 힘과 에너지를 얻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무슨 마법사나 주술사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말한 의도의 핵심은, 꿈이란 우리의 무의식의 표출이므로 우리의 의식으로 무의식을 조절할 수만 있게 된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는 꿈을 꿀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꿈도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려 들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꿈에 얽매이고 정확하지도 않은 꿈의 해몽 법에 사로잡혀, 오히려 부정적인 자기 암시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려고 나쁜 꿈이 꾸어진 것이 아니라 그런 꿈에 얽매인 자신의 또 다른 무의식이 거꾸로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것임을 알기 바랍니다.
우리의 정신은 때로는 불가사의 할 정도로 알 수 없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정신력으로 못해낼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꿈을 통해 보았던 불길한 암시를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에 저장했다가 우리의 정신이 그것을 이루려고, 말하자면 작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정신의 힘이 크게 작용할 경우 나쁜 꿈조차도 현실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꿈을 통해 예지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사실은 이미 영적인 감각이 많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그가 꿈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어떤 예감이 무의식에 담겨 있다가 그의 꿈으로 표출된 것이고 그런 꿈이기에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꿈 자체가 영험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발달한 그 사람의 정신과 의식이 영험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좋은 꿈을 꾸려면 의도적으로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것을 보고 들으며 좋은 마음 상태로 지내려 할 때 행복한 마음이 가득 담긴 우리의 무의식은 행복한 꿈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함이나 죄책 감등으로 짓눌리지 않고 마음을 항상 편하게 가지면 악몽을 꾸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하여, 현실적으로나 이성적인 판단으로 볼 때 전혀 연결조차 되지도 않는 꿈을 꾸고도 우리가 그 꿈의 노예가 되어버린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현실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을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의미에서 개꿈이라 한 것일 겁니다.
나는 지금도 거의 매일 꿈을 꾸지만 깨기 직전의 꿈이어서 또렷하게 기억이 될지라도 더 이상 심각하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선택적으로, 꿈에서조차 너무나 기분이 좋았던 어떤 것만을 고이 간직하듯 마음에 담아둡니다.
꿈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금까지의 말에 상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좋은 게 좋다고 이왕에 꾸어진 꿈이고 그 꿈으로 인해 하루가 즐겁고 밝은 자기 암시를 하는데 효과적인 것이라면 구태여 부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꿈을 꾸든 안 꾸든, 또 꿈에 연연하든 안 하든 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밝게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꿈에 지배당하지 말고 우리가 꿈을 다스리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