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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택 Jan 07. 2024

긴 봄(長春)을 떠나다(3)

충칭으로 갈래? 집으로 갈래?

  창춘 시내 지점을 개설하고 1년이 지난 2000년 4월 중순. 나는 중국지역본부장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충칭 초대 지점장으로 발령을 낼 것이니 충칭으로 건너가 충칭-서울노선 취항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창춘에 온 지 20개월이 지났으니 겨울이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동북지역 생활에 이미 적응했다. 남은 재임 기간 2년 4개월 동안 주경야독을 위해 길림 동북아연구원 대학원에 시험을 치고 등록까지 마쳤다. 


  2000년 9월에는 창춘시가 주최하는 국제 도서 박람회에 협찬 회사의 자격으로 개막식 내·외빈 단상 12석 중 두 석에 앉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중국지역본부장과 함께 앉을 요량이었다. 당시 창춘시는 10만 위안의 행사 협찬금을 지점에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창춘시는 항공의 인·허가권을 가진 코우안빤(口岸办, 항만청)과 공항 CIQ의 실권을 행사하는 삐엔팡(边防, 공항 출입국 관리)을 통해 내게 압력을 넣었다. 


  나는 이를 본사에 보고하고 어렵게 미화 10,000불을 승인받아 창춘시에 협찬금으로 전달하고 대신 박람회 관련 모든 홍보에 아시아나를 소개(TV 방송 광고 포함)하는 협찬사의 특전을 얻었다. 당초 창춘시가 요구한 위안화로 지급하지 않고 달러로 지급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본사 부사장이 “만 불이면 만 불이고 2만 불이면 2만 불이지 10만 위안이 뭐냐?”라고 하며 달러화 지급으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금호타이어 미국지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그 시절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중국 위안화보다는 달러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당시 환율로 10만 위안이 1만 달러보다 한화 기준 값어치가 컸다. 본사에서는 이러한 일선 지점의 행사 광고비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전례도 없었으니 지점장이 너무 나선다고 여겼을 것이다. 일선 지점장 주제에 예산에도 없는 돈을 쓴다고 하니 누가 좋아했겠는가? 어쨌든 이 모든 일은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창춘을 떠나야 하니 말이다.


  나는 중국지역본부장에게 창춘에 할 일이 많다고 사양을 했다. 그는 지금 당장 가방 하나 들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잔말 말고 충칭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당시 노총각이어서 딸린 가족이 없었다. 가방 하나 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고도의 기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렇지.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충칭에 가고 싶어 하는 직원들도 많은데 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인가? 처음에는 사정하고 설득하는 어조로 이야기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가 틀렸던지 협박으로 급선회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충칭으로 갈래? 집으로 갈래?”      


  서울-충칭 취항 예정일이 2개월 정도 남았으니 급히 서둘러야 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함께 갈 직원이 필요했다. 충칭에서 지점개설 업무와 충칭-서울 취항을 함께 준비할 중국 직원이 필요했다. 나는 충칭 현지에서 한국어 가능한 중국인 직원을 채용하기도 어렵고 또 채용한다 해도 OJT(On the Job Training) 등 공항 업무 교육에 시간이 지체될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연변에서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 시간상 훨씬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날 밤 창춘-옌지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창춘역에서 저녁 9시경에 열차를 타고 침대칸에 몸을 눕히면 다음 날 아침 6시경에 옌지역에 도착한다. 연변대학에 한국어와 영어가 가능한 졸업반 학생 추천을 의뢰해 놓았으니 내일 오전 학교에 가서 면접하면 된다. 열차가 덜컹거리며 창춘역을 빠져나간다.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라 바로 옆 식당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복무원에게 캉스푸 컵라면과 하얼빈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칭다오 맥주를 찾았으나 없었고 하얼빈 맥주가 눈에 들어왔다. 캉스푸 팡비엔미엔(方便面, 라면)은 한국 라면과 다른 맛이지만 나름대로 입안을 자극하는 강렬한 매운맛이 있다. 면발은 우리의 것처럼 탱탱한 질감이 없고 덜 익은 수제비를 씹는 느낌이지만 얼얼하고 기름진 마라 소스의 국물 맛이 입안에 함께 퍼지면 그래도 먹을 만하다. 


  덜컹거리는 식당 칸 안에 마라탕의 내음이 덩달아 흔들거린다. 하얼빈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제 며칠 후면 나는 가방 하나 들고 창춘을 떠나 충칭으로 간다. 함께할 좋은 직원을 만나게 해 달라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옌지역에 도착하니 연길신문 기자가 나와 있었다. 옌지에 있는 여행사와 대리점을 만나기 위해 출장할 때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 준다. 여느 때처럼 그가 몰고 온 폭스바겐 차를 타고 연변대학으로 향했다. 6명의 학생을 면접했고, 그중 겨울연가의 남자 주인공을 닮아 수려한 외모에 단정한 태도, 그리고 인상이 좋은 영어 전공의 남학생 한 명에 마음이 갔다. 그에게 고향을 떠나 멀리 충칭까지 가서 일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냐고 물었고 그는 좋다고 대답했다. 


  창춘에서 충칭까지는 먼 길이다. 창춘에서 베이징까지 비행기로 2시간이 넘게 걸리고,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충칭까지 2시간 20분 정도를 가야 한다. 나는 그에게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친구, 친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이틀 후에 창춘지점으로 출근해서 공항업무 OJT에 돌입하도록 했다. 그리고 3주 동안의 OJT가 끝나면 나는 그를 충칭으로 불러들여 취항 막바지 준비에 본격 투입할 작정이었다.


  기차역에서부터 학교까지 그리고 다시 기차역으로 온종일 기사 역할을 해 준 연길신문 기자는 직원 채용이 끝나자마자 창춘으로 떠나려는 나를 붙들고 하룻저녁 머물고 가라며 통사정을 한다. 나는 고마움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열차에 올라탔다. 옌지에 출장하는 날이면 도착 첫날 저녁부터 52도 바이지우(白酒)로 나를 골탕 먹이며 웃고 좋아하던 그들이다. 그들과 마주 앉아 도수 높은 바이지우를 맥주 컵으로 깐뻬이(干杯) 할 때면 마치 죽을 것처럼 괴롭다. 그래도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반겨 주는 그들이 고맙기만 하다. 나는 열차 침대에 누웠다. 점심 반주로 한잔 곁들인 38도의 지엔난춘(剑南春) 향기가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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