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 25일 저녁 7시, 나는 검은색의 날렵한 007 샘소나이트 하드 케이스 하나를 들고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충칭 장베이국제공항(重庆江北国际机场)에 도착했다. Air China 항공편으로 베이징 서우두국제공항(北京首都国际机场)을 출발한 지 2시간이 좀 지나서다. 램프에 주기한 항공기의 트랩을 내려와 에어차이나 항공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입국 게이트로 향하는 길에 두 개의 탑승 브릿지가 눈에 들어왔다. 램프에서 본 공항의 규모는 창춘과 비슷하지만 탑승 브릿지가 없는 창춘공항보다는 조금 더 현대화된 느낌이다. 초저녁이면 난방용 땔감을 태우느라 시커먼 연기와 나무 타는 냄새로 가득한 창춘과는 달리 충칭은 비교적 깨끗해 보였다. 긴 통로를 따라 걷다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옷가지가 담긴 캐리어를 찾아 끌고 국내선 입국장을 빠져나가니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30대 초반의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다가갔다.
그는 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옌지시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또 고등학교를 그곳에서 졸업했다. 대도시에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열차를 타고 옌지에서 창춘과 선양을 거쳐 충칭으로 왔다. 충칭에서 미술대학을 다녔으며 대학에서 와이프를 만나 일찌감치 결혼했다. 부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학 때의 전공과는 상관없이 함께 여행사를 창업했다. 이제 58일이 지나면 아시아나항공의 색동날개가 한국인 관광객을 태우고 이곳 충칭으로 들어온다. 충칭-서울노선 취항 준비를 위해 오늘 이곳에 왔으니 나는 어쩌면 그가 오래도록 기다려 온 반가운 손님이었을지도 모른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에 우리는 입국장을 걸어 나와 그의 도요타 오딧세이를 타고 이슬비 내리는 공항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어느덧 해는 져서 어둑해지고 자동차 윈도우에 부딪히는 이슬비는 지나는 차량의 불빛에 반사되어 밤하늘에 연신 비늘처럼 흩날린다. 밤거리가 궁금해 살짝 열어 둔 차창 사이로 솜털 같은 빗방울이 날려 들어와 다정스럽게 얼굴에 부딪힌다.
앞자리 조수석에 앉은 그가 뒤를 돌아보며 충칭은 사·나흘에 한 번씩 비가 오는데 많은 양은 아니고 이렇게 이슬비가 날린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충칭은 습기가 많아 남자든 여자든 피부가 좋다고 자랑한다. 시내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몇 마디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유쾌했다. 서울-충칭 직항편 취항일까지 남은 58일. 생면부지의 타향에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취항을 준비해야 하는 두려움과 부담감이 있지만 도움받을 사람이 있으니 내심 걱정을 덜었다.
30분 정도를 달리니 전장 1.2km의 황화위엔 대교(黄花园大桥)가 눈앞에 들어왔다. 대교 아래로는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고 대교 건너편으로는 육중한 도시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홍콩처럼 크고 화려한 도시가 다리 아래로 도도하게 흐르는 물줄기의 건너편에 높고 낮은 불빛으로 펼쳐져 있다. 중국의 서부 내륙에 이렇게 큰 도시가 있다니!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가 장강의 지류인 자링강(嘉陵江)이다. 자링강의 물줄기가 도시의 중심부를 감고 돌아 장강과 다시 만난다. 충칭은 장강의 상류에 위치한다. 저 물줄기가 바로 장강삼협을 거쳐 우한과 상하이로 흐르고 그것이 다시 바다로 흐른다.
장강삼협 유람은 충칭의 자링강과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서로 부딪히며 만나는 차오톈먼(朝天門)에서 시작한다. 두 마리 수컷 사자가 영역을 두고 다투듯 두 물줄기가 서로 부딪쳐 으르렁거리며 높고 낮은 물결로 빠르게 흘러간다. 그곳에서 유람선 빅토리아호를 타면 구당협, 무협, 서릉협의 삼협을 지나 충칭에서 우한까지 3박 4일의 장강삼협 유람이 시작된다. 가는 도중에 군데군데 삼국지 명소에 들러 역사소설 속 영웅호걸들의 흔적을 찾는다. 장비묘를 찾아 그의 거대한 동상 앞에 서면 그가 들고 있는 장팔사모가 언제라도 허공을 내려칠 듯하다. 유비가 아들 유선을 제갈량한테 맡기고 숨을 거둔 백제성의 탁고당(托孤堂)에는 병든 영웅의 슬픔이 느껴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