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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택 Jan 23. 2024

머물지 않고 건너가다

새로운 삶의 스위치를 켜다

  2017년 금호아시아나를 떠났다. 햇수로 30년이니 내 청춘의 기억은 그곳에 있다. 도전과 갈등 속에서 성장하고 익었다. 고맙고 감사하다. 


  새로운 삶의 스위치를 켰다. 많은 게 달라졌다. 새벽 5시 50분. 판교에서 9003번을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지하도로 한참을 내려가 공항철도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던 길. 이제 가지 않아도 된다. 꽉 쥐었던 주먹도 풀었다. 


  아내랑 판교 현대백화점 5층 CGV 매장에서 커피를 들고 다시 8층으로 올라가 조조할인 영화를 보는 것도 새로운 삶의 일부가 되었다. 판교 아브뉴프랑의 스타벅스에서 도로 쪽 창가 자리에 앉아 아내랑 나란히 앉아 먹는 브런치와 커피는 집 떠나 여행하는 느낌을 준다.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니 지난 기억이 새롭다.


  1988년 입사해서 그 이듬해 초 김포공항으로 발령을 받고 국내선 103호* 검색대에서 승객 소지품을 바구니에 담아 열심히 돌리던 일. 행여나 아는 사람이나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던 일. 그러다, “여기서 평생 바구니만 돌리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바구니를 돌릴 바에야 멋지게 돌리자!”라는 깨우침을 얻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구니를 던지면 정확하게 승객 앞에 멈추게 하는 도(道)를 통했다. 


* 공항 경찰대를 말한다


  항공기 탑승 마감 시간에 출발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미탑승 승객의 이름을 모기 목소리로 부르던 기억. 이 또한 도를 통하니 목소리가 절로 커진다. 나와 눈이 마주친 승객은 “그놈 목청 참 좋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손님의 탑승권을 뽑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자판기를 두드리던 내 손을 보고 마치 피아노 치듯 하다고 말을 건네던 어느 평범한 30대 초반의 여인.


  만석으로 좌석이 없어서 go show*로 카운터에서 조바심을 내며 대기하다가 last minute**에 좌석을 받아 뛰어가면서 고맙다며 던지듯 놓고 가는 죽엽청주 한 병.


* 예약하지 않고 공항 카운터에 나오는 것을 go show라 한다. 이와 반대로, 예약하고 공항에 나오지 않은 것을 no show라 한다.

** 체크인 카운터의 탑승수속 마감 시점을 말한다.


  공항 사무실에서 숙직하는 직원을 집에 보내고 자청하여 대신 숙직하면서 사무실에 있는 항공 관련 서적을 이것저것 뒤져가며 밤새도록 공부하던 학구열.


  손님으로부터 공항 최초의 칭송 레터를 받던 일.


  신입직원들을 못살게 구는 상사를 좀 말려 달라고 하소연하는 직원들을 대신하여, 그 상사를 찾아가 ‘영웅본색’의 마크(주윤발 역) 스타일로 문제를 제기했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고 스타일 완전히 구겼던 일.


  지나고 보니 이런저런 일들이 새롭다.


  1992년 김포공항 국제선에서 본사 국제업무실로 발령을 받고 항공협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출장이 아니면 가 보기 힘든 나라에 가는 행운을 누렸다.


  요구르트로 유명한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일반 시민은 출입도 어렵다는 최고급 호텔 로비에서 항공회담 대표단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건너편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우리 대표단 일행에 연거푸 윙크를 날리던 여성. 무서웠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한국대사관에서 항공회담 대표단 저 건너편 책상 옆에 선 채로 “God loves you!”라며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던 대사관 여직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아침 일찍 비키니 차림으로 조깅을 즐기며 회담대표단 앞을 지나가는 60대 후반의 여성. 그 힘차게 달리는 모습을 보고 우리 모두 깜짝 놀랐던 기억.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의 어느 뒷골목에 있는 소극장에서 처음 접한 탱고의 현란하고 강렬했던 인상.


  돌아보니 가슴 설렜던 기억들이 많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8년 7월 과장 3년 차에 창춘지점장으로 발령받아 중국 근무를 시작했다. 그 이듬해인 1999년 4월 8일 장춘 시내지점 개설, 2000년 6월 22일 충칭-서울 정기편 취항 및 충칭(重慶)지점 개설, 그리고 2001년 4월 18일 청두-인천 정기편 취항 및 청두(成都)지점 개설. 그 격동의 개척 세월인 5년 반 동안의 중국 근무를 마치고 2004년 1월 서울로 돌아와 보니, 마흔을 넘긴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좌절과 고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의수의 저서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는 크고 작은 실패와 시련을 겪은 것, 그것은 대견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실패로부터 경험을 익히고, 시련으로부터 인내를 배웠다. 그리고, 마흔을 넘긴 나이에 충칭에서 아들을 얻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으니 남보다 늦은 인생을 사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 젊게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짧은 인생. 내가 주인되는 새로운 삶이 무엇일까? 성장 없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나를 다른 곳으로 인도해야 했다. 머물지 않고 호기심을 따라 건너가는 것. 새로운 삶의 스위치를 켰다. 햇수로 30년의 회사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 그리고 중국의 인연들은 오늘 내게 무척 소중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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