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국내선 레벨 카운터
레벨 카운터는 체크인 카운터의 맨 오른쪽에 있다. 그 옆 통로로 들어가면 총괄사무실이 있다. 나는 총괄사무실에서 레벨 카운터로 나가기 전에 항상 기도부터 한다.
“오늘 하루도 문제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게 하소서!”
그 기도 덕분에 나는 레벨 업무를 보는 동안 한 번의 사고도 없었다. 국내선에 하루 18편 정도 운항하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오후 근무조로 레벨 카운터에 올라가 마지막 제주행 항공편까지 전 편을 176석 만석으로 보낸 공항 최초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그날, 마지막 한 편을 남겨두고 공항 지점장부터 그 아래 관리자의 모든 시선은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한 편만 만석으로 나가면 하루 전편 만석이라는 공항 최초의 역사를 쓴다.
일요일 제주 마지막 항공편은 신혼부부가 많다. 이들은 종종 카운터에 늦게 나타난다. 체크인 컨트롤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당일 마지막 편의 예약상황은 좌석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예약하지 않고 공항에 나온 고쇼(Go-show) 승객을 흡수해야 만석으로 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고쇼 승객을 받을 수는 없다. 혹시라도 예약한 신혼부부가 탑승하지 못한 사례가 발생하면 낭패다.
나는 마지막 항공편을 만석으로 채워 보냈다. 카운터 담당 신 과장이 내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씨익 웃는다. 그는 평소에도 잘 웃는다. 위로부터 칭찬 좀 받았다는 표시다. 퇴근하는 뒷모습을 보니 발걸음도 가볍다. 그는 칭찬 좀 받아도 된다. 내가 처음에 레벨 업무보는 것에 대해 다른 관리자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창업 초기에 대한항공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다. 오직 그 혼자만이 나를 레벨로 밀어부쳤다. 성과를 냈으니 칭찬받을만하다.
1989년 1월 금호그룹 공채 1기로 김포공항에 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뒤로 신입직원이 꼬리를 물고 몰려 들어왔다. 나도 갓 입사한 신입인데 어느새 고참이 되었다. 대한항공에서 온 대리가 너무 괴롭힌다고 좀 살려달라고 하소연 한다. 힘들었던 모양이다. 대한항공에서 온 관리자를 제외하면 우리가 그룹 공채 1기였으니 신입직원이 기댈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그를 찾아가 영웅본색의 마크 스타일로 문제를 제기했다. 욕만 바가지로 얻어 먹고 스타일 완전히 구겼다. 덕분에 반항한다는 이미지로 남았다. 그랬으니 내가 레벨 업무하는 것을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에게 들림을 받았고 전편을 만석으로 마감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그리고 집중하지 않으면 이루기 힘든 공항 최초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레벨은 레벨 카운터의 컴퓨터 하나로 체크인 카운터에 있는 모든 컴퓨터와 건너편 발권 카운터의 컴퓨터, 그리고 출발 라운지에 있는 컴퓨터까지 통제한다.
레벨은 각 항공편의 예약자 수와 체크인 수를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아직 체크인하지 않은 예약자 수와 잔여 좌석 수를 확인한다. 예약 없이 나온 고쇼 승객을 각 카운터에서 체크인할 수 있도록 노렉(NO-REC, No Record) 체크인 기능을 활성화한다. 예약하지 않고 공항에 나온 승객은 시스템에 기록이 없다. 이들을 기록이 없다고 해서 노렉이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체크인 엔트리는 일반 예약자들과 다르다. 레벨이 체크인 기능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일반 카운터에서 체크인하지 못한다.
레벨은 노쇼(No-show)가 많아 비행기가 비어갈 것으로 판단되면 노렉 체크인 기능을 활성화하여 일반 카운터에서 체크인이 가능하도록 한다. 그러다 체크인 수가 증가하면 다시 노렉 체크인 기능을 막는 작업을 반복한다. 예약자가 카운터에 나와 체크인하는 숫자와 예약 없이 카운터에 나와 체크인 한 숫자를 시간 경과와 함께 균형을 맞추며 탑승율을 최적화한다.
예를 들어, 176석의 B737 항공편에 190명이 예약되어 있다. 출발시간 40분 전에 예약 없이 건너편 발권 카운터에 고쇼 승객 3명이 나타났다. 레벨은 그 두 사람을 출발시간 15분 전까지 25분 동안 대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즉시 좌석을 주든지 결정해야 한다.
대기하게 하면 이 두 사람은 대한항공 카운터로 간다. 바로 좌석을 주면 기존 예약자들이 다 나오는 경우 예약자가 탑승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공항에서 소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여러분이 레벨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항공으로 갈 가능성을 감수하고 대기하도록 안내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즉시 자리를 줘서 매출로 연결할 것인가? 전자는 안정적 성향의 레벨로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는 없으나 항공기가 비어 갈 가능성이 있다. 후자는 도전적 성향의 레벨로서 항공기는 만석으로 채울 수 있으나 탑승하지 못한 예약자가 나타나 소란을 피울 수 있다. 여러분이 레벨이라면 어느 선택을 할 것인가?
지금은 예약자의 사전 발권과 예약 취소 절차 등 선진화한 예약문화를 정착했다. 그러지 못한 과거에는 노쇼가 많았고 으레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예약 관리부서는 좌석 유실을 막기 위해 항상 초과예약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높은 노쇼는 항공기가 비어 갈 가능성을 높인다. 레벨은 예약 없이 공항에 나온 고쇼 승객을 적절히 흡수하여 항공기가 비어 갈 가능성을 차단한다. 또 지나친 고쇼 처리로 예약자가 탑승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도의 고쇼 처리 역량을 발휘한다.
레벨은 노쇼, 고쇼를 적절히 관리하여 매 항공편의 탑승률 향상에 기여하는 것 이외에도, 웨이트·앤·밸런스 시트(W&B Sheet)라고 하는 항공기의 무게 중심 도면을 출력하여 기장에게 전달한다. 초기에는 체크인 카운터에서 출력하여 카운터 직원이 항공기로 달려가 기장에게 전달했다. 나중에는 출발 카운터 프린터로 전송하면 출발 직원이 이를 기장에게 전달하도록 시스템을 개선했다. 정시운항을 위해 시간을 단축했다. 칵핏(Cockpit)에서 운항 준비를 하는 기장은 이 W&B Sheet를 받아 항공기의 적재 현황을 확인하고 서명한 후 한 부를 직원에게 전달한다.
W&B Sheet는 승객, 화물, 항공유 등의 적재 현황과 항공기 중량 등 항공기 운항과 관련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항공기의 무게 중심(CG, Center of Gravity)이 정상범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여 준다. Airbus Safety First(2023)에 따르면, National Aerospace Laboratory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Weight & Balance와 관련된 항공기 사고를 조사했다. 그중 21%는 초과 중량(Overweight)이 원인이었고 35%는 무게 중심(CG)이 허용 범위를 벗어난 것이 원인이었다. 레벨이 수행하는 W&B Sheet 작성은 항공기 안전 운항에 중요한 업무다.
체크인 카운터 직원이 카운터에 나온 승객의 요구에 따라 창(Window) 또는 통로(Aisle)의 명령어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항공기의 CG를 계산하여 자동으로 좌석을 배정한다. 직원이 좌석번호를 지정하여 탑승권을 출력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컴퓨터가 입력된 명령어에 따라 먼저 온 사람에게 앞쪽 창가 좌석을 배정했으면 다음에 온 사람은 컴퓨터가 CG를 자동으로 계산하여 뒤쪽 창가를 배정한다.
혹시라도 예전에 체크인 카운터에서 맨 뒤의 좌석을 받고 속상하신 분이 계셨다면 이제는 화를 푸시라고 말씀드린다. 그것은 직원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컴퓨터가 그렇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