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떠나자
제목: 『덫: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연재소설의 배경은 항공산업을 바탕으로 하나, 실제 항공사, 기관, 등장인물, 사건과는 무관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아름답게 떠나자
하계 특송 시즌이 끝나가는 8월 중순.
여름철 사무실 냉방 온도는 26도로 관리한다. 오픈 공간에 직원 밀도가 높아 덥다. 컴퓨터는 뜨거운 열을 내뿜는다. 옆자리 동료가 헉헉거리며 내쉬는 입김이 뜨겁다.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핀다.
다들 씩씩거리며 실내 온도를 1도만 낮춰달라고 아우성이다. 임호 부장은 팀원에게 1도를 낮추게 한다.
뉴스타공항(New Star Airport) 신선호 대표가 임호 부장을 자기 방으로 불렀다.
뉴스타공항은 뉴스타항공(New Star Airlines)에 지상조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다. 임호 부장은 13년 전 뉴스타항공 국내선팀에서 그와 1년 동안 일한 적이 있다.
신선호에게는 초능력이 있다.
타임테이블(Timetable)을 통째 외운다. 타임테이블은 항공편 스케줄을 목적지별, 시간대별로 수록하여 만든 접이식 책자다. 양복 앞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좋게 명함보다 좀 크게 만들었다.
신선호는 타임테이블에 수록된 국내선 스케줄을 외우고 다닌다.
뉴스타항공 주기성 사장이 국내선을 이용하는 날이면 국내선팀 신선호 팀장이 공항에 나가 사장을 에스코트(Escort)한다. 신선호 팀장은 주기성 사장이 타는 항공편 앞뒤로 출발하는 태양항공(Taeyang Air)의 스케줄까지도 암기한다. 사장의 기습적인 질문에 즉시 대답하기 위해서다.
“다음 우리 항공편이 몇 시에 있지?”
“네, 한 시간 후에 NS8935편이 있습니다.”
“태양항공은?”
“30분 후에 TY1053편이 운항합니다.”
신선호 팀장은 그의 초능력으로 뉴스타항공 사장 눈에 띄었다.
팀원들은 비생산적인 일에 과도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고 뒤에서 그를 조롱한다. 그러건 말건 그는 승승장구했다. 그는 바람의 방향을 감지하는 고도의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신선호 대표와 같은 태양항공 출신들은 창립 초기에 넘어와 뉴스타항공의 기초를 닦았다. 태양항공 업무 매뉴얼을 닥치는 대로 가져와 창립 공신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회사 내 각 부문에 포진하여 세를 구축했다. 30년 굴곡의 역사에 주역으로 행세했다. 그룹 내 대표기업인 뉴스타항공 사장 자리는 물론이고 계열사인 저비용 항공사(LCC, Low Cost Carrier)의 대표 자리, 그리고 지상조업사인 뉴스타공항의 대표 자리까지 차지했다.
“임 부장, 경영지원팀장 업무는 적성에 맞나?”
신선호 대표는 임 부장이 의자에 앉자마자 물었다.
임 부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이 갔다. 올 초 이곳 대표로 오면서 임 부장을 포함한 팀장급 직원에 대한 파악을 끝냈을 것이다. 임 부장보다 나이 어린 이곳 임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겠지. 신선호 대표와 같이 일한 인연으로 말하자면 그 임원들보다는 임 부장이 먼저다. 회사 상황을 파악할 요량이라면 임 부장 말도 들어보는 지혜와 포용력이 있어야 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적성에 안 맞습니다.”
임 부장은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경영지원팀장은 회사의 비용 집행을 관장한다.
직무의 성격상 윗사람의 말에 고분고분 충성할 수 있는 자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임호 부장은 상사의 말을 덮어놓고 따르는 순종적인 인물은 아니다.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특정 개인 또는 일부 구성원의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거부한다.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다고 해서 으레 그러려니 하며 직무 유기의 과오를 범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임호 부장의 명줄을 쥐고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상황이 그러하니 윗사람들은 경영지원팀장에 앉아 있는 임 부장이 늘 불편했다.
임 부장은 경영지원팀장 자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어느 팀장으로 가는 것이 좋을까? 현장에는 마땅한 팀장 자리도 없을 텐데.”
“연말에 그만둘 생각입니다.”
임 부장은 한치의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신 대표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영혼 없는 말투로 물었다.
“제가 나가야 후배들이 팀장 자리에 올라올 수 있습니다. 이제는 비켜주려 합니다.”
“음---.”
남들은 팀장 자리가 아니어도 1년이라도 더 붙어있으려고 애를 쓴다.
항공은 임 부장 동기는 물론이고 1년, 2년 후배 기수인 팀장들도 희망퇴직으로 몰기 시작했다. 일부 팀장은 보직에서 내려오게 하고 인사팀 대기발령으로 부서 배정도 하지 않았다. 회사의 복도나 빈 장소에 벽을 향해 책상 하나 내어주고 하루 내내 앉아 있게 한다. 인사팀 직원이 와서 핸드폰을 압수해가고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에 돌려준다. 청춘을 바쳐온 회사가 일순간에 자신을 퇴물 취급한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선 노숙자의 기분이다.
아직 학업 중인 막내의 교육비를 생각하면, 내년에 결혼할 장녀를 생각하면, 이깟 수모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거대한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자신이 초라해지기 시작한다. 점점 이 힘든 싸움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배신감과 스트레스로 머리 빠지는 양은 늘어나고 없던 병이 생길 지경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임 부장은 제 발로 나가겠다며 호기를 부린다. 그에게 팀장에서 내려와달라고 말한 것도 아니다. 임 부장은 기왕에 그만두는 것이니 떠나는 뒷모습이라도 멋있게 보이고 싶다. 한마디 덧붙인다.
“내년 조직개편을 준비하셔야죠. 저 때문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좀 일찍 말씀드렸습니다. 연말에 제가 갑자기 사표를 내면 재조정하는 번거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임 부장은 진심이었다. “그만두려면 좀 빨리 이야기하지. 두 번 일하게 하고 있어.”라는 식의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나가면서까지 말이다.
“으음---.”
그만둔다고 하는 놈이 별 걱정을 다하고 있군. 그는 잠시 턱을 괴고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그만두고 뭘 할 건지 계획은 세웠나?”
“우선 좀 쉴 생각입니다.”
임 부장은 지쳐있었다. 들여다보면 마음속 이곳저곳 상처도 많다.
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해서 지금껏 태양항공 출신 상사들의 지휘를 받았다. 그들은 모든 요직을 장악했다. 어느 순간 거대한 권력이 되었고 그 권력은 공채 1기로 시작한 임 부장의 목을 조여왔다. 임 부장은 오랜 시간 배척과 채워지지 않는 결핍 속에서 호흡 역시 거칠어져 있었다.
임 부장은 신선호 대표에게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하는 순간 그들의 지휘체계, 그들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훈장이고 역사다
임 부장은 컴퓨터에서 경력증명서를 출력했다.
30년의 부서 이동과 직무경력이 거기에 담겼다. 13개 부서를 옮겨 다녔으니 한두 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나온 흔적이 한 장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국내선 103호(공항 경찰대) 검색대에서 승객 소지품을 바구니에 담아 돌리던 일. 행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다, “여기서 평생 바구니만 돌리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바구니를 돌릴 바에야 멋지게 돌리자!”라는 깨우침을 얻었다. 어느 순간, 바구니를 밀어 던지면 정확하게 승객 앞에 멈추게 하는 도(道)를 통했다.
항공기 탑승 마감 시간에 출발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미탑승 승객의 이름을 모기 목소리로 부르던 기억. 이 또한 도를 통하니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승객이 “그놈 목청 참 좋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손님의 탑승권을 뽑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자판을 두드리던 임호의 손.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다 "피아노 잘 치나봐요. 손가락이 예뻐요."라며 말을 건네던 30대 초반의 여인.
대만에서 입국한 당일 국내선 예약을 하지 못해 고쇼(Go show, 예약 없이 공항에 나오는 것)로 카운터에서 대기하던 화교 승객. 조바심을 태우며 대기하다 라스트 미닛(Last minute, 탑승수속 마감 시점)에 좌석을 받고 뛰어가며 고맙다고 던지듯 놓고 가는 죽엽청주 한 병.
숙직 직원을 집에 보내고 자청하여 대신 숙직하면서 공항 총괄사무실에 있는 항공 관련 서적을 이것저것 뒤져가며 밤새도록 공부하던 학구열.
손님으로부터 공항 최초의 칭송 레터를 받던 일.
국내선 전편을 만석으로 보내 공항 최초의 기록을 썼던 일.
신입직원을 못살게 구는 출발 담당 대리를 좀 말려 달라고 하소연하는 후배 직원들. 그들을 대신해서 그를 찾아가 ‘영웅본색’의 마크(주윤발 역) 스타일로 문제를 제기하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고 스타일 완전히 구겼던 일.
항공회담 참석을 위한 출장 때문에 가보기 힘든 나라에 가는 행운을 누렸다.
요구르트로 유명한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일반 시민은 출입도 어렵다는 최고급 호텔 로비에서 항공회담 대표단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건너편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대표단 일행에 연거푸 윙크를 날리던 육중한 체구의 여성. 무서웠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국대사관.
항공회담 대표단이 앉은 자리 저 건너편 책상 옆에 선 채로 “God loves you!”라며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던 키 작은 대사관 여직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
아침 일찍 비키니 차림으로 조깅을 즐기며 지나가는 60대 후반의 여성. 날렵한 근육질에 힘차게 달리는 모습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던 기억.
리우데자네이루 코스메 벨류역에서 20~30분마다 출발하는 코르코바두 산악열차 트렘 두 코르코바두(Trem do Corcovado).
그 열차를 타고 20여 분 정도를 완만한 속도로 올라가면 해발 710m의 산 정상에 38m 높이의 거대한 예수상이 우뚝 서 있다. 예수상의 발밑에서 고개를 들어 예수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어느새 임호는 그의 품에 안겨 죄의 사함을 받는다.
구름 한 점이 예수의 품을 간지럽히다 바람에 실려 대서양 바다 쪽으로 흘러간다. 구름을 따라 눈을 옮기니 리우데자네이루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예수상이 굽어보는 저 평화로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다. 마약과 매춘, 총기 강도·절도가 횡행한다. 세계 3대 미항인 코파카바나 해변의 불빛은 아름답지만 몇 블록 벗어나면 총성이 들린다. 삼바 춤을 추는 무희의 움직임은 화려하고 인상적이지만 저녁 늦은 거리에선 아이들이 코카인을 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의 뒷골목 소극장에서 처음 접한 탱고의 현란하고 강렬했던 기억.
라 쿰파르시타(La Cumparsita)의 강렬한 스타카토(Staccato)와 싱코페이션(Syncopation)의 리듬 위로 두 남녀가 엉켜 타고 흐르는 현란한 발의 놀림은 관객의 혼을 빼고서야 끝난다.
축구를 너무 사랑해 가는 곳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국민 전체가 공을 차는 나라.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Rabat)의 힐튼 호텔(Hilton Rabat)에서 먹는 아침 식사.
유난히 많은 중국인들이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진출을 대변한다. 일렬로 늘어선 야자수들이 북아프리카 해안 도시의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Tehran)의 한국 대사가 회담대표단을 대사 공관으로 초대했다. 날이 어두워 넓은 정원의 규모는 헤아릴 수 없으나 실내 규모가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입에서 슬슬 녹는 양고기(Lamb)와 석류 주스는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9년에 걸친 중국 시장개발 공정에 크고 작은 역할을 한 것은 임호의 행운이다. 그 이면엔 음모와 모함이 그를 잡기 위해 도사리고 있었다. 태양항공 출신들이 그룹 공채 1기인 그의 숨통을 끊으려고 군데군데 덫을 놓았다.
회사를 떠나면서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소중하다. 회사는 임호에게 석별의 정을 담은 이별주 한잔 베풀지 않았지만 임호에게는 그 모든 것이 훈장이고 역사다.
<<본문을 구성하는 내용과 인물은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