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으로 가는 계단이다
독점으로 가는 계단이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다.
그해 2월 정부는 동양그룹에 제2 민항을 허가했다.
제2 민항 발표가 있던 다음날.
일진그룹 회장은 아침 일찍 태양항공 사장과 전략기획 부문 임원들을 회장실로 불렀다. 중역들이 회장실로 하나하나 들어선다. 승무원 출신의 비서가 투명하고 맑게 우려낸 연한 황록색의 녹차를 가지고 뒤따라 들어온다. 실내에 신선하고 은은한 녹차 향기가 진동한다. 큰 키의 비서는 절제된 미소를 지으며 태양 마크가 새겨진 찻잔을 중역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놓고 방을 나간다.
“동양그룹이 제2 민항으로 선정됐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녹차 한 모금을 입에 적신 차중락 회장이 중역들에게 물었다.
“재계 1, 2위 그룹이 아니어서 우리로선 다행입니다.”
전략기획 담당 부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6·25 전쟁 중에 주한 미군 물자를 트럭으로 수송하던 시절부터 차 회장과 고락을 함께했다.
“그렇지. 그들은 자금력도 있고 자체적으로 항공 수요가 있어요. 매년 해외 출장 인원과 수출·입 화물 물동량이 상당합니다. 우리를 이용하던 고객이 경쟁사가 되는 것은 피했어요.”
차 회장은 재계 순위 20위 밖의 동양그룹이 제2 민항에 선정된 것에 안심했다.
“동양그룹이면 괜찮아요. 버스 회사가 항공사 운영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차 회장은 동양그룹이 고속버스 사업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빗대어 말했다.
“10년 안에 위기가 옵니다. 두고 봐요. 인수·합병의 기회가 올 테니까. 잘 흔들면 우리 입에 들어올 수 있어요.”
“하하하!”
유머를 섞어 내뱉는 거침없는 회장의 말투에 중역들은 맞장구치며 크게 웃었다. 동양그룹은 아직 항공사를 출범하기도 전인데 차중락 회장은 농담처럼 인수를 언급했다.
“뜬금없이 인수·합병 이야기를 하니 무슨 소린가 할 거요. 자, 잘 들어봐요.”
차 회장은 손목시계를 풀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양손 깍지를 낀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태세다.
“항공시장의 환경이 변했어요. 정부가 독점체제를 끝내고 복수 항공사 경쟁체제를 시작했습니다. 그간 신생 항공사의 시장진입을 막아왔는데 이제 허용한 겁니다. 지금은 동양그룹 하나지만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는 또 몇 개의 항공사가 더 들어올지 몰라요. 선진 국가들의 항공 규제 완화 정책을 보면 짐작할 수 있어요. 일단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으니까 이건 우리에게 심각한 위협입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어요. 독점 모드에서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았는데 경쟁 모드로 전환한 겁니다. 상황이 180도 변했습니다. 맘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차 회장은 식어가는 녹차를 입에 적시고는 말을 이어갔다.
“미국이 항공 규제를 완화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이에요.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카터 대통령이 1978년에 항공사 규제 완화법(Airline Deregulation Act)을 도입했어요. 이 법을 통해 민간항공의 가격, 노선, 그리고 신생 항공사의 시장진입에 대한 정부 규제를 제거하기 시작했어요. 항공 규제가 완화되니 어때요? 항공사들의 노선진입이 자유로워졌죠. 자연스럽게 항공사들은 과잉 경쟁을 시작했어요. 제 살 깎아 먹기식 저가 경쟁이 벌어진 거지. 수익성은 악화하고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니 방법이 없어요. 항공사 간 인수·합병과 도산이 줄지어 발생할 수밖에요. 이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감이 잡히나요?”
차 회장이 일장 연설을 늘어놓다가 불쑥 물었다.
“항공 규제 완화에 의한 경쟁의 역기능을 말씀하셨습니다. 경쟁이 조직 혁신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순기능적인 면도 있지만,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할 수도 있습니다. 태양항공은 지난 20년 동안 독점체제에 있다 보니 혁신을 기피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태양항공이 혁신은 멀리하고 제2 민항 저지를 위해 공격적 가격 경쟁에 치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으신 겁니다.”
차송호 사장이 회장의 의중을 읽었다.
“바로 그거야. 미국이 항공 규제를 완화한 이후에 먼저 쓰러진 건 메이저 항공사가 아니에요. 중소형, 중대형 항공사가 먼저 쓰러졌어요.”
차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티슈 한 장을 뽑아 입가를 닦았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후발 항공사는 노선망을 확대하고 점유율을 늘려야 하는 부담감이 있어요. 시장잠식을 위해 죽기살기식의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죠. 수입단가가 하락하든 말든 탑승률을 1%, 2% 올리는 데 집중해요. 우리는 그들이 탑승률 경쟁에 매몰되는 것을 지켜보면 됩니다. 수익 노선 방어에 치중하고 비용 우위를 유지해야 해요. 영업이익률을 최대한 높은 수준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10년 후, 20년 후에 가만히 있어도 우리에게 기회가 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차 사장이 대답하고 중역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호응했다.
그들은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차 회장의 안목에 놀랐다. 차 회장은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손목시계를 들어 왼쪽 손목에 차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들 핵심 부서 인력들 관리 잘하세요. 며칠 후에 있을 정기인사에서 대대적으로 진급시키고. 특별히 작년에 진급하지 못한 직원들은 가능하면 모두 진급시키세요. 부서마다 고문관과 꼴통들이 있을 테니 이들은 이번에 저쪽으로 다 넘어가게 하고---.”
“하하하!”
중역들은 차 회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회사의 운명이 사람 손에 달렸어요. 핵심 인력은 넘어가지 않도록 단도리 잘하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 이하 임원들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자, 사장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 일 보세요.”
중역들이 뒷걸음질로 회장실을 나갔다. 비서가 들어와 빈 찻잔들을 하나하나 들고 나간다. 차중락 회장이 아들 차송호 사장을 가까이 오게 했다.
“정부가 제2 민항을 10개월 안에 취항하도록 시기를 못 박았다. 늦어도 12월 말에는 첫 비행기를 띄울 거야. 우리 사람들을 빼가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
차 회장은 아들 차송호 사장과 단둘이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한다.
그는 A4 용지 한 장을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동양그룹이 항공사를 공식 출범하면 교통부를 접촉할 일이 많아질 거야. 항공 심의관을 포함해서 과장급 서기관들 관리 잘 부탁한다. 당분간 정보는 이들의 입에서 나올 테니까. 후발 항공사의 내부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태양항공은 그간 교통부 항공 부문 인사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항공편 예약, 좌석 업그레이드, 선호 좌석 배정, 빠른 보안 수속, 라운지 이용, 마스(MAAS, Meet and Assist, VIP 고객에게 제공하는 밀착 서비스) 등 모든 특혜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간 태양항공이 누린 독점적 지위는 항공 규제 당국의 보호 및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가 만들어낸 하나의 질서다. 기존 항공사와 항공 규제 당국 간의 이러한 보호적 관계가 신생 항공사의 시장진입을 가로막아왔다.
“네, 관리 잘하겠습니다.”
차송호 사장 역시 항공 당국과의 접촉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차 회장은 이니셜이 새겨진 몽블랑 볼펜을 꺼내 앞에 놓인 A4 용지 위에 무언가를 적어 아들 앞에 놓았다.
“아버님, 이 두 사람은?”
차송호 사장도 단둘이 있을 때는 호칭을 자유롭게 했다.
차 사장은 A4 용지에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는 수습 여승무원이고, 또 하나는 올해 대리 진급 대상이다. 둘 다 탈락시켜라.”
“네?”
차송호 사장은 부친의 의중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차중락 회장은 아들 앞에 놓인 A4 용지를 자기 앞으로 끌어와 그 위에 ‘독점’ ‘경쟁’ 네 글자를 쓰고 아들에게 다시 건넸다.
“무슨 의미이신지요?”
차송호 사장은 두 사람의 이름과 그리고 독점, 경쟁의 네 글자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의아했다. 갈수록 궁금증만 깊어갔다.
“잘 들어봐.”
차 회장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국영인 태양항공공사(SAL)를 인수하여 항공업에 발을 들인 것이 벌써 20년째다. 당시 항공기 9대에 취항 국가는 일본이 전부였어. 직원은 500명이었다. 그렇게 보잘 없던 회사가 지금은 항공기 60대에 직원은 10,000명이 넘어. 취항지도 미주, 유럽 국가를 포함해서 18개 국가에 30개 도시야. 인수 당시 18억이었던 연 매출이 1조6,000억으로 성장했다. 20년 동안 매출이 매년 10%씩 성장한 거야. 고속 성장이지. 너는 이 고속 성장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느냐?”
“신생 항공사의 진입을 막은 정부의 항공 규제 정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미래를 읽고 준비하는 아버님의 사업적 혜안과 수완은 차치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차 사장은 평소 화물 운송을 포함하여 항공 운송 서비스 시장을 내다보는 부친의 동물적 감각을 높게 평가해왔다.
그의 부친은 1971년 로스앤젤레스에 처녀 취항할 때 화물기를 먼저 취항했다. 여객기를 먼저 취항하여 시장에 진입하는 여객 중심의 선진 항공사와는 전략과 접근방식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초반부터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10년 동안 연평균 9%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수출 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경제 호황을 구가했다. 차 회장은 미주 항공화물의 성장세가 뚜렷한 것에 주목하고 화물기 취항을 서둘렀다.
반면에 항공 여객 시장은 아직 국민의 해외관광이 자유롭지 못해 여객기 취항은 뒤로 미루었다. 그는 화물기 취항 후 1년이 지나서야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에 여객기를 취항했다. LA 교민들은 화물기가 취항한 것을 보고 여객기도 곧 들어올 줄로 알았지만 일 년이 걸렸다. 가난한 조국의 항공기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이국만리 미국으로 취항하는 날 하와이 공항과 LA 공항에는 수많은 교민이 마중을 나왔다. 활주로에 도착해서 위풍당당하게 램프로 들어오는 조국의 항공기를 보고 교민들은 감동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그렇지, 정부의 항공 규제 정책이야. 정확히 말하면 독점이다.”
“독점요?”
“그래, 독점. 너도 알다시피, 정부가 항공 운송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인식하고 독점체제를 견지했어. 적자였던 국영 항공사를 인수했으니 정부는 우리가 성장할 때까지 시장을 보호할 책임도 있었던 거야. 덕분에 우리는 이만큼 성장했다.”
비서가 커피잔을 들고 들어와 두 사람 앞에 놓고 나가는 동안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일부 대기업들이 해외 사업 확장을 위해 전용기 운영, 화물 전용 항공사 설립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교통부는 그때마다 일관되게 반대했지. 국가가 항공운송서비스산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그 명분이야. 시장에 다른 플레이어가 들어오면 과잉 경쟁으로 시장이 혼탁해질 우려가 있어. 그래서 제2 민항의 출범과 시장진입을 그동안 규제한 거야.”
“네, 그랬습니다.”
차 사장은 회장의 말에 맞장구치며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 상황이 변했다. 독점이 깨지고 복수 항공사 경쟁 시대가 열렸어.”
차 회장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아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 독점이란 것이 양날의 칼이야. 안정적 성장이라는 과실에 맛이 들다 보면 혁신에 무뎌지는 매너리즘에 빠져. 예전대로 하다가 우왕좌왕하면 이제는 우리가 먹힐 수도 있다. 이런 위기감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해.”
“조직의 인력과 구조를 경쟁 구도로 신속히 전환하겠습니다. 교통부 등 정부를 대상으로 한 대외 전략 부문, 여행사와 대리점을 대상으로 한 영업 판매 부문, 항공여객을 대상으로 한 공항 및 객실 서비스 부문 등 부문별 대응 수준을 격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차 사장은 부친의 말뜻을 이해하고 선제적으로 대답했다.
“그래야겠지. 경쟁체제를 빨리 가동해야겠지. 그런데 경쟁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사실 독점이야."
"네?"
"독점. 이걸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경쟁노선에서 후발 항공사가 가격 경쟁으로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점 수요층을 확보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후발 항공사가 시장에 신규 진입하면 저가를 이용해 시장점유율과 탑승률을 올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저가수요를 개발하도록 유도하고 우리는 정부·기관과 기업의 출장 수요, 고위직 공무원과 기업 총수·임원진의 퍼스트·비즈니스 클래스 수요, 그리고 충성고객 수요를 대상으로 독점 수요 풀(Pool)을 확보하는 거야. 마켓 자체를 차별화하는 거야.”
차 회장은 그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말이 길어졌다. 요점 두 가지만 말하고 끝내자.”
차 회장은 커피잔을 만지면서 말을 이어갔다.
“첫째, 항공 심의관을 만나서 후발 항공사에 대한 정보 수집을 활성화해라. 동양그룹이 제2 민항을 출범하면 항공 심의관과 접촉이 빈번해질 것이다. 그는 우리 사람이니 잘 도와줄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둘째, 수습 여승무원은 결격 사유를 잡아 수습 해제하고, 다른 사람은 진급에서 탈락시켜라. 독점으로 가는 계단이다.”
차 회장은 어리둥절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들을 가까이 오게 하여 귓속말을 건넨다.
“네? ---알겠습니다.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극비로 다루어야 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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