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과 산업화 덕분에 대기업에 입사하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김포공항에 입성하다
“여보세요!”
광양 특유의 억양이 들려왔다. 성모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광양이 고향이다. 광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남 남해군과 인접해있어서 그런지 경상도 말투에 가깝다. 내륙으로 멀리 떨어진 광주와는 말투가 다르다. 같은 전남인데도 광주 사람과 광양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하면 상대방의 말투가 웃긴다고 서로 낄낄거린다.
“성모야, 너 입사 지원 서류 냈냐?”
임호는 성모가 지원서를 제출했는지 물었다.
“아니, 아직 못 냈다. 학과장 추천서는 받았고, 국회의원 추천서는 오늘 꼰대가 받는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
성모의 아버지는 해병대 대령 출신이다. 장성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했다. 평소 지역 활동에 적극적이고 사교 관계가 넓어 국회의원 추천서 받는 것쯤은 문제없다.
"마감이 언제냐?"
성모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줄로 알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서둘러, 인마! 모레가 마감이야.”
입사서류 제출 마감일이 언제인 줄도 모르고 다니던 친구 송성모는 임호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급해졌다.
임호는 지난주 중어중문학과 학과장인 문 교수를 찾아가 추천서를 받았다.
그는 제자가 입사한다고 하니 기쁜 모양이다. 환한 얼굴로 흔쾌히 추천서를 써주며 덕담까지 건넸다. 임호와 같이 졸업한 김도운이 경찰 경위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했다고 알려준다. 도운은 아버지가 상이군인 출신이라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이 있다. 그는 다른 수험자들에게는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문 교수는 도운의 취직 사실을 내게 공유하며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제자들의 취직이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임호는 도운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도운은 2년 전 군대를 제대하고 중어중문학과 3학년에 복학했다. 임호는 그가 복학하기 1년 전에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 정부는 1981년 미등록 사유로 학사 제적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재입학을 허가했다. 1980년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시기에 미등록으로 피해를 본 학생들을 구제한다는 방침이었다. 임호는 정부 정책으로 인하여 1985년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 3학년에 진학하면서 당시 복학한 도운을 처음 만났다.
도운은 걸을 때마다 엉덩이를 왼쪽으로 빼고 오른손을 앞뒤로 흔들며 건들건들 걷는 습관이 있다. 뒤에서 보면 영락없이 날라리다. 호리호리한 키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다. 같은 과 4학년에 다니는 여자 선배 하나는 그가 좋다고 따라다녔다. 그녀 역시 큰 키에 서구적 마스크여서 그녀를 낚아챈 도운은 4학년 선배 남학생들의 눈총을 샀다.
도운은 학과 카니발 행사에서 술에 취했던지 객기를 부리다가 임호와 충돌했다. 성질 급한 도운이 임호에게 선빵을 날렸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동작이 떴다. 임호는 그의 오른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머리를 낮추며 오른손을 뻗었다. 도운의 손이 임호의 머리카락을 스쳤고 임호의 오른손바닥은 도운의 왼쪽 턱을 가격했다.
임호는 의도적으로 어깨에 힘을 싣지 않았다. 주먹도 쥐지 않고 손바닥으로 가격하여 도운의 턱에 주는 충격을 완화했다. 주변에 있던 학과생들이 몰려와 말렸다. 턱을 맞은 도운은 잠시 후 정신을 차렸는지 임호의 팔을 잡아 끌고 이야기 좀 하자며 자리를 뜬다. 무안했던 모양이다. 둘은 학교 뒷문 족발집에서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화해했다. 그 일로 둘은 가까워졌다.
도운이 제대하고 복학하여 3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다.
군대에 있을 때 사귀던 여성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제대하면서 그녀와 하룻저녁을 같이 한 후 교제를 끊었다. 연락 없이 3개월을 지냈는데 갑자기 찾아온 그녀가 도운은 영 내키지 않았다. 학과생들 눈을 피해 그녀를 학교 앞 이층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도운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
“빨리 이야기해, 수업 있어.”
“나 임신했어.”
그녀는 도운보다 세 살 연상이다.
“뭐? 미쳤어?”
도운은 충격을 받은 듯 다방 홀 중앙 천장에 걸린 싸구려 샹젤리제로 눈길을 돌렸다.
“우리 헤어졌잖아. 지금 어떡하자는 거야.”
“나 낳을 거야. 지우자는 이야기는 하지 마.”
그녀는 이미 출산을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도운이 이번엔 한참 동안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나 이제 3학년이야. 졸업하려면 2년이나 남았어. 취직도 해야 하고. 아빠 될 준비도 안 됐어. 내 인생 망치려는 거야 지금?”
도운은 당황하여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26세의 청년이 감당하기에 힘든 순간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을 꽉 다물고 도운을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봐. 이러지 말고.”
도운은 가까이 다가앉으며 설득 모드로 전환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일어나 다방을 먼저 나갔다. 도운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입을 오므려 도넛 모양의 담배 연기를 만들어 샹젤리제 쪽으로 날려 보낸다.
수개월이 흐르고 그녀는 아이 하나를 안고 도운 앞에 나타났다.
딸이다. 도운은 딸이 생겼다는 기쁨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도운은 아이를 받아 안고 이 사실을 어머니께 알렸다. 어머니는 갓난아이를 우선 도운의 누나에게 맡겨 키우기로 결정했다. 도운은 자기 말을 듣지 않은 그녀가 괘씸했다.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부모의 반대도 심했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녀를 냉정하게 떨쳐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운에게 소장이 날아들었다. 그녀가 혼인빙자간음죄로 도운을 고소했다. 결혼을 약속하고 성관계를 했으며 그 결과 아이를 낳았는데 생모로부터 아이를 뺏어 갔다고 고소했다.
혼인빙자간음죄의 형량은 3년 이하의 징역형과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형이 선고되면 그는 경찰 간부후보생 시험을 볼 수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도운과 결혼하는 것이 목표고 물러설 생각도 없다.
도운은 이듬해 4학년이 되던 그해 봄에 결혼했다. 임호는 도운의 부탁을 받고 그들의 결혼식 사회를 봤다. 그는 딸 하나를 더 낳고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임호는 학과장 추천서를 받으러 갔다가 도운의 취업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와의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호야, 지원서 제출했다."
다음날 성모는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고 임호에게 알려왔다.
성모는 광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광주에서 자취하며 다녔다. 부모 밑에서 눈치 보며 살다가 광주에서 혼자 생활하니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한다. 틈만 나면 임호와 함께 사복으로 갈아입고 충장로 우다방(우체국 앞) 뒷골목의 음악감상실 ‘너랑나랑’을 찾는다. 학생회관 앞 2층 건물에 있는 그곳은 좀 논다는 여고생, 남고생이 성인처럼 꾸미고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관절염 약을 끼고 살았다. 젊은 놈이 틈만 나면 아이고, 아이고 하며 노인 흉내를 내지만 힘은 장사다. 그는 임호와 고등학교 동창이고 임호처럼 중국어를 전공했다. 이젠 취직마저도 같은 회사에 입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녀석, 지겹게도 쫓아다니는군.
1988년은 서울 올림픽 특수와 1986년부터 3년 동안 이어진 3저 호황(저유가, 저달러, 저금리)으로 연평균 12%의 고성장을 지속했다. 한국 경제가 정점을 향해 달리던 때였다. 기업들의 채용 규모는 이전과 비교하여 현저히 늘었다. 대기업들은 대졸 신입을 매년 수천 명씩 채용하며 공채 문화를 정착했다. 기업의 리쿠르트 담당 요원들은 대학을 방문하여 입사지원서를 배포하고 설명회를 하면서 인재 채용에 나섰다.
임호나 성모나 지금처럼 입사 경쟁이 치열했다면 그 둘은 입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어 몇 마디 하는 것을 제외하면 토익도 본 적이 없다. 스펙이라고는 내놓을 게 없다. 당연히 떨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임호는 긴 머리에 노래를 짓거나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성모는 영등포나 종로 어느 골목에서 호프집을 하며 어릴 적 시골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둘은 어렵지 않게 입사에 성공했다. 학과장 추천서와 국회의원 추천서가 있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입사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스펙도 좋지 않은 지방대 출신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라의 경제성장과 산업화 덕분이었다. 임호와 성모는 나란히 동양그룹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임호는 용산 데이콤센터에서 항공 예약·운송 관련 여객 서비스 시스템(Passenger Service System) 교육을 받았다. 처음 1주는 컴퓨터예약시스템(CRS, Computer Reservation System)에 관한 교육이다. 다음 1주는 운송 서비스에 관한 교육이었다. 임호는 난생처음 접해보는 항공 실무 교육이라 신기하고 흥분되었다.
컴퓨터에 예약자의 성명과 여정, 그리고 전화번호 등 인적 사항을 입력하고 저장하면 PNR(Passenger Name Record)이라고 하는 승객의 예약 기록이 생성된다. 승객이 항공기 탑승을 위해 공항 카운터에 쇼업(Show up)하면 카운터 직원은 출발관리시스템(DCS, Departure Control System)에서 승객의 예약 기록인 PNR을 모니터에 불러낸다. PNR의 이름과 여정을 확인한 후 해당 항공편에 좌석을 배정하고 짐을 수속한다. 이 일련의 예약·운송 여객 서비스 교육 과정은 임호에게 흥분 그 자체였다. 틈만 나면 찾아가 놀던 충장로 1가 입구의 태극기 핀볼 게임이나 디지털 슬롯머신이 주는 재미는 여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성모와 임호는 교육장 바로 옆에 월 15만 원짜리 하숙집에서 교육장을 왔다 갔다 하며 신입의 꿈을 키웠다. 4주 교육을 마치고 이듬해 1월 초 그룹 입사 동기 200명 중 66명이 뉴스타항공에 배치되었다. 임호는 고교 후배인 윤상봉, 필리핀에서 유학한 박성한, 입사 시험에서 토익 최고 점수를 받은 안동훈, 그리고 훗날 중국 구이린 지점장 근무 중에 괴한의 공격을 받은 김강타 등과 함께 김포공항 여객 운송 업무에 투입되었다.
김포공항에는 뉴스타항공으로 일찍 입사한 여직원들이 먼저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룹 공채 1기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일손이 부족한 탓인지 공채 1기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김포공항에 입성했다.
<<본문을 구성하는 내용과 인물은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