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트·앤·밸런스 시트(Weight & Balance Sheet)
항공기 마감 시점에 모든 카운터의 체크인을 종료하고 W&B Sheet를 출력하는데 간혹 출력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항공기 출발시간에 쫓겨 긴장감에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컴퓨터에서 일부 승객의 좌석을 옮기거나 수하물의 적재 위치를 바꾸면 항공기의 무게 중심(CG, Center of Gravity)이 정상범위 안에 들어온다. 이렇게 하면 대부분 W&B Sheet의 출력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승객과 수하물의 적재 위치를 변경해도 CG가 정상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아 W&B Sheet가 출력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숙직 중에 항공기 운항 관련 서적을 공부하다가 항공편에 입력된 데이터를 리셋(Reset)하는 엔트리를 숙지했다. 여객 및 화물, 급유 등 항공기 운항과 관련한 적재 데이터를 각 부문은 컴퓨터에 형성된 해당 항공편에 입력한다. 내가 공부한 서적에서는 에러 발생 시 리셋 엔트리를 사용하여 항공편을 기본 데이터로 재구성하도록 안내한다. 나는 이 운항 관련 엔트리가 내가 속한 여객 운송부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으나 호기심에 암기하고 있었다.
1990년 상반기 어느 하루 김포-광주행 항공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항공기 체크인 마감 시점이 되었다. 나는 각 체크인 카운터에 체크인을 종료한다고 통보하고 해당 항공편의 마감 작업에 돌입했다. 체크인 데이터의 업로드를 완료하고 W&B Sheet 출력을 시도했다. 모니터에 항공기의 CG가 빠진 것으로 메시지가 떴다. 'Out of CG'.
평소와 같이 승객과 수하물의 위치를 약간 조정했다. W&B Sheet가 출력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계속 ‘Out of CG’ 메시지만 떴다. 긴장감이 더해 간다. 항공기 출발시간이 다가오니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주위에서는 내가 신속히 해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정 안되면 종이 도면을 가져다가 매뉴얼로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전에 숙직하며 공부했던 리셋 엔트리를 먼저 사용해보기로 했다.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항공편을 리셋하고 여객 및 수하물 데이터를 신속하게 다시 업로드(Up-load)했다. 항공편 마감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W&B Sheet를 출력했다. 기장에게 전달하고 항공기를 정시에 출발시켰다.
나는 뿌듯했다. 목에 힘도 들어갔다. 주변에서도 놀라는 눈빛이다.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숙직하며 남모르게 공부했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내가 좋았다. 그날도 숙직 직원을 집에 보내고 대신 숙직하면서 여느 때보다 더욱 향학열에 불타 서적을 뒤적이고 있었다. 뭔가 큰일을 했다는 성취감에 취해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운항관리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즉슨, 오늘 서울-광주 항공편에 항공유 3,000파운드(LBS)를 추가로 실었는데 컴퓨터에 누락되었다, 혹시 이 사항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어왔다. 순간 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레벨 업무 중에 W&B Sheet가 출력되지 않아 리셋했다는 이야기를 망설임 없이 했다. 그는 자신들이 원인을 찾고 있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한마디 덧붙였다. 자신들이 경위를 더 파악하고 혹시 내게 책임소재를 물을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면 좋겠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남겼다. 동시에 나의 소속과 성명을 받아 적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그 말은 두렵지 않았다. 별다른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모든 항공편은 운항 목적지에 따라 기본 데이터가 내장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서울-광주 항공편은 항공유가 기본적으로 14,400파운드(LBS)가 세팅되어 있다(내 기억에 그렇다). 지상조업사는 기장의 별도 요청이 없으면 목적지별로 세팅된 기본 급유량만 급유한다. 기장은 도착지 공항인 광주의 기상 상태를 확인하고 항공유를 3,000LBS 더 급유하도록 사전 요청했고 그에 따라 항공유를 총 17,400LBS를 실은 것이다.
그런데 항공기 마감 시점에 W&B Sheet를 출력할 수 없어 항공편을 리셋하였고 추가 급유한 3,000LBS의 항공유가 컴퓨터에 누락되고 말았다. 나는 컴퓨터에서 항공편을 리셋하면서 추가 급유한 항공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해 후속 입력 조치를 하지 못했다.
추가 급유한 3,000LBS의 항공유가 누락된 W&B Sheet를 받아 본 기장은 자기가 3,000LBS를 더 싣도록 요청을 했는데 서류상 반영이 되어 있질 않으니 의아했을 것이다. 기장은 광주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가 요청한 대로 3,000LBS가 추가로 급유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운항관리실은 실제로 급유한 사실을 확인하고 W&B Sheet상에 누락된 사유를 찾다가 저녁 늦게 총괄사무실로 전화했고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사무실에서 숙직하는 날이 줄었다. 섣불리 알고 있는 것들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