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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0화] 시말서의 명인이 되다

공항 최초의 기록을 쓰다

by 충칭인연

광주에 내려오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은 오후 스케줄 근무다. 오전 항공편으로 올라가면 출근하는 데 지장은 없다. 임호는 출근하지 않았다. 무단결근을 했다.


좀 더 참았으면 좋았을 것을. 자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확장될 일은 아니었는데 일이 꼬였다. 호기를 부리며 내려왔는데 내심 두렵다. 취직했다고 축하를 받은 것이 1년이 채 안 됐는데 그만둔다고 하면 꼴이 말이 아니다. 집에는 휴가 중이라고 말하고 쏟아지는 의심의 눈길을 피했다.


임호는 저녁에 사업하는 친구 조정현을 만났다. 육전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금남로 1가 입구 2층의 바(Bar)로 향했다. 30대 후반의 여사장이 운영하는 업소이며 조정현의 단골집이다. 여사장의 사업수완이 좋아 항상 손님이 많다.


조정현이 가게로 들어서면 여사장이 직접 양주와 맥주를 가져다주며 반갑게 맞아준다. 여사장이 잠시 앉았다 가면 홀에서 서빙하는 아가씨 두 명이 옆에 앉는다. 그녀들은 손님이 오면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그날 상황에 맞게 매상 올리느라 분주하다. 그녀들은 팁을 줘도 받질 않는다. 여사장이 그렇게 가르쳐서 노팁 문화는 그 가게의 특색이다.


조정현과 임호는 학창시절 딴따라(그룹사운드)로 활약했다.

조정현은 세컨드 기타를 쳤고 임호는 드럼을 쳤다. 저녁 7시가 되면 충장로 1가 지하 1층에 있는 막걸리 고고홀에서 연주했다. 금남로 1가의 관광호텔 2층 나이트클럽은 640cc 맥주 3병에 마른안주 하나, 과일안주 하나가 기본이다. 이곳 막걸리 고고홀은 소주와 막걸리도 판다. 지갑이 얇은 샐러리맨들이 나이트클럽 분위기 내기는 그만이다.


저녁 7시면 초저녁이라 손님이 클럽을 찾기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임호 밴드가 한 시간 동안 오프닝 연주를 했다. 스피커를 밖으로 연결해서 연주 음악을 내보내면 초저녁 거리를 지나는 주당들의 발길이 입구에서 머뭇거린다. 밴드는 The Knack의 My Sharona, Kiss의 Love Gun, Dire Straits의 Sultans of Swing, 그리고 국내 가요로는 이종용의 너 등을 연주했다. 리드 기타의 실력은 당대 최고였지만 나머지 멤버들의 실력은 리드 기타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들은 빠르고 비트가 강한 고고음악과 록큰롤, 그리고 홍키통키의 헤비메탈 음악으로 초저녁 술손님을 유혹했다.


광주에 내려가 조정현을 만나는 날이면 두 사람은 어김없이 예전 그룹사운드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임호는 취기가 돌자 광주에 갑자기 내려온 이유를 정현에게 설명했다.


“호야, 그럼 오늘 결근한 건데 회사에서는 연락 없냐?”

“응, 없다.”

“내일도 연락 없으면 저녁 비행기로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 무단결근이 길어지면 그들이 너를 처분하기가 좋다. 지금은 그들도 당황스러울 거야. 봐라, 태양항공 출신 대리가 공채 1기를 괴롭혀서 쫓아냈다고 말이 돌면 그들도 입장 난처하지 않겠어?”

“그러잖아도 내일이나 모레쯤 내게 올라오라고 연락이 올 테니 못 이긴 척하고 올라오란다.”

“그래? 잘됐네. 내가 보니까 별일 없겠다.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나랑 술이나 마시자. 일어나. 3차 가게.”

임호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친구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그날 새벽 1시가 넘도록 3차까지 있다가 헤어졌다.


지점장을 면담하다


임호는 이재명 총괄과장을 찾아갔다.

이 과장은 일단 지점장 면담부터 하자고 임호를 지점장실로 안내했다.

임호는 지점장에게 깊숙이 예를 표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임호 씨.”

“예---.”

또 침묵이 흐른다. 심장 뛰는 소리가 임호의 귀에 들려왔다.


“나는 임호 씨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내 직장생활에 비추어봐도 이런 일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면 임호 씨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광주에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테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나가보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구구절절 긴 말은 하지 않았다. 풍채에 어울리게 짧고 굵게 자기의 생각을 위엄있게 전달했다. 임호는 이재명 총괄과장 데스크로 가서 면담 내용을 간략 보고했다. 이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한 가지 지시사항을 임호에게 전달했다.


“임호 씨, 이대로 넘어가자는 의견도 있지만 대리급 직원들이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최소한 시말서는 받아야 한다고 하니까 내일까지 시말서를 제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과장님.”


시말서의 명인이 되다


임호는 콩나물국에 저녁밥을 먹고 방에 들어와 앉았다.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머릿속으로는 시말서의 내용을 어떻게 전개할지 구상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육하원칙에 따라 일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향후 각오가 간결하고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구도를 잡았다. 일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절제되고 호소력 있는 표현을 사용해 태양항공 출신 대리급 직원들과 신입직원들 간의 갈등을 암시하는 복선을 까는 것이 유익할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진정성이 느껴져야 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지점장과 운송부 이사에게 진정성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대충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임호는 입가에 침이 고였다. 자신의 진심과 고뇌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필체 한 자 한 자에 정성이 깃드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첫째, 잉크와 펜으로 쓸 것이며,

둘째, 옥편을 옆에 두고 모르는 한자는 하나하나 찾아서 시말서의 대부분을 한자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임호는 샤워를 하고 정신을 맑게 한 후 방에 앉아 눈을 감았다.

시말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정을 훌쩍 넘겼다.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시말서 다섯 장을 쓰고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다시 한번 읽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임호는 자신이 쓴 글에 스스로 만족했다. 시말서를 봉투에 담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다음날 이재명 총괄과장에게 시말서를 제출했다.

그는 시말서를 담은 편지 봉투가 두툼한 것이 의외인 듯 손으로 잡고 몇 번 눌러보고는 그것을 책상 위에 놓았다.

“무슨 시말서가 이리 두툼해? ---알았으니 나가봐.”

“예, 가보겠습니다.”


임호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시말서를 쓴 탓에 그것의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고 있었다.

임호는 총괄과장의 입장에서, 그리고 지점장이 되어서, 또 운송부 이사가 되어 각각의 역할 관점에서 머릿속에 사진처럼 찍혀있는 시말서를 읽고 또 읽었다. 시말서의 다면적 관점 분석을 통해 나름대로 각자의 반응을 헤아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조바심으로 보냈다.


다음 날 출근하니 총괄과장이 임호를 찾았다.

“과장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거기 앉아.”

과장 데스크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니 그가 미소를 띠며 말을 시작했다.

“임호 씨, 사실 시말서를 써오면 읽지도 않고 찢어버리려고 했다. 대리들이 몰려와 시말서를 최소 다섯 번은 쓰게 해서 이번에 아주 버르장머리를 고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 시말서를 봉투에서 꺼내는 순간 도저히 찢을 수가 없었다. 왜인지 아나?”

“---.”

임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마르고 갈증이 느껴졌다.


“세 가지에 놀랐다. 첫째, 잉크와 펜으로 한자를 섞어 필체의 흔들림 없이 다섯 장을 일관되게 쓴 것에 놀랐다. 둘째, 기승전결을 통해 구성한 문맥의 호소력과 설득력에 놀랐다. 셋째, 무엇보다도 글의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 도저히 찢을 수 없었다.”

임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슴속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운송 이사께서 임호 씨 시말서를 보더니, 자기 평생 이렇게 잘 쓴 시말서는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시말서 잘 썼다고 칭찬받은 사람은 임호 씨가 유일할 거야. 이사님이 읽어보시더니, 이 정도면 분명히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현장에 내려가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하셨다.”

이 과장은 말을 하다가 자기도 웃음이 나오는지 허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별도의 추가 조치 없이 이 시말서 한 번으로 끝내기로 했다. 이제 지난 일은 잊고 평소처럼 근무에 충실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임호는 총괄사무실을 나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시말서 잘 썼다고 칭찬을 받다니!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나서 임호는 손님으로부터 칭송 레터 한 통을 받았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임호의 도움을 받은 손님이 친절한 서비스 응대에 고맙다며 회사로 칭송 레터를 보내왔다.

총괄과장이 카운터로 임호를 찾아왔다.


“시말서의 명인! 칭송 레터를 받았네. 공항 최초야. 축하해.”

“예, 감사합니다.”

“저번에 시말서 쓴 거 이번 칭송 레터로 까는 거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과장님.”

그도 웃고 임호도 웃었다.


임호는 국내선에서 최초의 전편 만석, 최초의 시말서 명인, 최초의 칭송 레터 등의 기록을 썼다.


<<본문을 구성하는 내용과 인물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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