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본사로 가다
본사로 가다
임호는 김포공항에서 3년의 현장 경험을 쌓았다.
인사부는 현장 경험을 구비한 인력의 재배치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임호를 국제업무실로 배치했다.
임호는 새로운 업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부서 명칭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기대감과 흥분을 안고 본사 5층에 있는 국제업무실로 출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 오른쪽에 서류 보관용 캐비닛이 있고 왼쪽으로도 길게 문서 보관 캐비닛이 놓여있다. 사무실의 배치는 모든 책상이 파티션 없이 입구 반대쪽을 향해 있었다. 입구로부터 멀리 맨 앞쪽에 여직원이 앉아 있다. 안쪽에서부터 직급순으로 책상을 배치한 것 같았다. 오른쪽 캐비닛 앞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캐비닛 뒤쪽 넓은 자리에 국제업무실장 데스크가 있다. 거기에 실장이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국제업무실로 발령받은 임호입니다.”
“어서 와요. 한도선 실장입니다.”
그는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단정한 용모와 말투에서 학자적 풍격이 느껴졌다. 차분한 눈매와 포근한 인상은 임호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해외 출장 간 직원도 있고, 과천 청사에 간 직원도 있으니 돌아오면 인사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 여직원의 안내를 받으세요. 홍미희 씨, 안내 좀 해줘요.”
홍미희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갓 입사해서 부서의 경리와 일반 관리 업무를 보고 있다. 조그맣고 동그란 얼굴에 눈이 크고 쌍꺼풀이며 코가 아담하게 오뚝 솟은 미인이다. 한도선 실장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여직원도 매우 밝고 선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본사 생활에 필요한 사항들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머리를 책상에 박고 서류를 골똘히 검토하고 있던 강호기 과장이 임호를 불렀다.
“국제업무실은 다른 부서와 다르게 좀 독특합니다. 조용하고 공부하는 분위기예요. 그간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근무했을 텐데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면 답답할 수 있겠네요.”
“예---.”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하다 보면 하나하나 적응할 겁니다. 우선 캐비닛에 있는 문서철을 보면 국가별로, 항공협정 별로 과거부터 항공 히스토리가 잘 정리되어 있어요. 우선 그것들을 빨리 습득하는 것이 좋아요. 명확히 꿰고 있어야 합니다. 위층 사장실에서 담당자를 찾아 언제 뭘 물어볼지 모릅니다.”
“예, 알겠습니다.”
임호는 사장이 직접 담당자에게 현안을 물어본다는 말에 바짝 긴장했다.
“임호 씨는 미국과 중국의 항공협정, 그리고 국제기구를 담당할 거예요. 관련 문서들을 빠짐없이 숙독하세요. 모르는 게 많을 테니 그때그때 물어보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침에 출근하여 책상에 앉으면 실내에 고요함과 적막함만 흐른다. 문서 넘기는 소리만 정적을 깰 뿐 점심시간 때까지 서로 한마디 하지 않는 날도 있다. 그저 머리를 책상에 처박고 각자 연구 모드에 돌입하면 그대로 하루가 지나간다. 업무 성격상 사내의 타 부서와 교류가 없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다 실내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공기에 천식 증세를 보인다. 그들은 국제업무실을 수면실이라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책상 위의 서류에 모두 다 코를 박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충성을 맹세하다
이틀 후 직원들이 출장에서 돌아왔다.
한도선 실장은 임호를 환영하는 회식을 회사 인근 단골 고기집에서 했다.
옆에 있는 김상도 대리가 술을 권한다.
“임호 씨, 소주 한잔 받아요. 술 잘하죠. 술 잘하게 생겼네.”
비꼬는 듯한 말투와 특유의 가벼운 몸짓이 그의 심술궂은 얼굴과 잘 어울렸다. 그는 임호의 소주잔에 소주병을 기울이며 임호가 잔 받기를 기다렸다.
“대리님,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한잔만 해도 죽습니다.”
임호는 그때까지 소주는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 그는 두 손을 겹쳐서 술잔을 가리고 김상도 대리가 주는 술을 사양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눈빛이 독한 뱀의 눈빛으로 변했다. 여차하면 독을 뿜을 기세다.
“아니, 소주 한 잔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자, 장난하지 말고 손 치워요.”
“진짭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임호는 소주를 정말 마시질 못한다.
“아니, 이럴 거요. 진짜?”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 상사가 주는 술을 거부하다니, 이런 괘씸한 놈을 봤나!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술병을 내던질 기세의 눈초리로 임호를 쏘아 보았다.
“김 대리, 임호 씨 그 술 날 주지. 내가 흑기사 한번 하지.”
분위기가 어색해지니 한도선 실장이 나섰다. 순간 김상도 대리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임호를 향하던 술병을 급히 거두었다.
“아, 예, 실장님, 그럼 실장님께 따르겠습니다.”
김 대리는 한도선 실장의 개입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속으로 꿍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회식이 끝날 때까지 임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임호는 감동했다. 공항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리더의 품격을 보았다. 솟구쳐 오르는 자발적 충성맹세가 입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충성을 다짐했다. 임호는 학창시절 태극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이후 두 번째다.
한도선 실장은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요하지 않는다. 술을 못 하는 사람들은 콜라 등 다른 음료를 마시게 한다. 그는 아침에 출근하면 녹차나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신다. 여직원이 아침마다 직원들 모두에게 차 심부름하는 문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백 마디의 말보다 몸소 실천하니 파급력이 강하다. 타 부서는 여전히 여직원이 일찍 출근하여 차 심부름부터 해야 하는 수고를 한다. 국제업무실은 달랐다. 리더십이 현격한 격차를 만든다. 임호는 한도선 실장의 이런 선진적인 사고나 행동이 좋았다. 그는 속으로 다시 한번 충성을 굳게 맹세했다.
임호가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데 김영산 사원이 따라 나왔다. 그는 그룹 공채 3기로 입사하여 현장 경험 없이 국제업무실로 바로 배치되었다. 임호에게는 입사 2년 후배다.
“선배님, 저도 술을 못하는데 저보다 더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 맥주는 한두 잔 하는데 소주는 영---.”
“김상도 대리 조심하세요. 곧 본색이 드러날 겁니다.”
“김 대리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선배님보다 한 살 아래입니다. 태양항공에서 넘어오면서 2년씩 올려 받고 와서 과장 진급 대상입니다.”
“예---.”
“강호기 과장도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앞으로 알게 되실 겁니다. 임성수 사원과 이왕근 대리는 중국어 특기자로 들어왔습니다. 주로 중국에 가 있어서 사무실에 있는 날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구재선 차장은 로열패밀리입니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부서원들에 대해 핵심적인 것만 잠깐 설명했다.
“아, 그래요? 남은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요. 일단 들어가죠. 오래 나와 있으면 이상하니까.”
“예, 선배님, 이번에 국제업무실로 오신다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아, 그래요? 잘 부탁할게요.”
“예, 말씀만 하십시오. 들어가시죠”
김영산은 쿠웨이트 왕가의 자제처럼 보였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새까만 눈썹과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다. 임호가 국제업무실로 발령받은 것은 김영산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부서 막내 사원으로 온갖 부서 업무를 혼자 감당했다. 그 역시 임호처럼 태양항공 후예들과는 이질감을 느낀다. 이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회식 자리로 돌아가니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한도선 실장이 소주잔을 들고 마무리 발언을 시작했다.
“자, 마무리합시다. 임호 씨가 우리 부서에 온 거 환영합니다. 공항 운송 현장의 경험이 풍부하니 부서 업무에 도움이 될 겁니다. 기대가 커요. 자, 국제업무실을! 위하여!”
“위하여!”
대리로 진급하다
임호는 국제업무실로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대리로 진급했다. 입사 3년이면 대리 진급 대상이다. 그는 진급했다고 특별한 기쁨은 느끼지 못했다. 봉급 좀 오른 것도 별 감흥은 없었다. 시간이 차고 회사에 기여가 있으면 주어지는 보상 정도로 생각했다.
김상도 대리는 과장으로 진급했다. 그가 임호를 밖으로 불렀다.
“임호 씨, 진급 축하해.”
그는 임호보다 한 살 아래이면서도 반말을 서슴지 않았다. 임호는 그가 자기보다 상사이니 그러려니 했다.
“예, 과장님도 진급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근데 공항에 있던 3년 동안 인사고과가 너무 안 좋아. 도대체 근무를 어떻게 했길래 고과가 그렇게 안 좋은 건가? 최하위야.”
“예---.”
임호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혁혁한 공로가 있어도 태양항공 후예들의 평가가 우선이다.
“진급시키면 안 된다는 압력이 있었는데, 한도선 실장이 밀어붙였어.”
그는 임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을 알려주었다. 마치 임호를 생각하는 것처럼. 임호는 그가 자신의 지난 고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에 의아했다.
태양항공 후예들은 본사, 공항 할 것 없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공항은 임호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김 과장에게 전달했다. 임호를 절대 진급시키지 말자는 공감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항의 의견을 김 과장이 직접 한도선 실장에게 보고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임호의 진급을 한도선 실장이 밀어붙였다는 사실을 김 과장이 알지 못한다. 김상도 과장이 공항에서 임호의 진급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한 실장에게 보고했고 한 실장이 이를 무시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실장님, 임호 씨의 공항 평가가 좋질 않다고 합니다. 공항 동기들 연락을 받았는데 공항에서 상사에게 반항한 사례가 있다고 실장님께 보고해달라고 합니다.”
“나도 공항에서 연락받았네. 인사팀에도 전화한 모양이야.”
“네--.”
“그런다고 이제는 우리 국제업무실 식구인데 그러면 되나. 알았으니 가보게.”
이렇게 한 실장이 공항의 건의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도선 실장은 여타 태양항공 후예들과는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김상도 과장은 언젠가는 한 실장이 임호에게 이 일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이름이 거론될 수도 있는 상황을 예상했다. 이를 대비해서 임호를 불러 자초지종을 알려주고 미리 연막을 핀 것이다. 임호는 내막을 알려준 김 과장의 호의가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왠지 향기롭지 못하다. 임호의 동물적인 직감이다. 물론 김영산 사원이 자신에게 김상도를 조심하라고 했던 것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김상도 과장이 일을 하나 저질렀다. 그의 무책임한 처사를 보고 그때부터 그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되었다.
<<본문을 구성하는 내용과 인물은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