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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2화] 아오모리현 지사를 로비에 세워 놓다

태양항공은 아오모리를 세계로 연결하는 창(窓)입니다

by 충칭인연

아오모리현 지사를 로비에서 기다리게 하다


임호가 국제업무실로 온 1992년부터 일본 전역에서 지자체장들이 태양항공과 뉴스타 항공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자기 지역으로 직항편을 띄워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다. 일본 지자체 간에 서울 직항로 개설을 놓고 경쟁이 붙었다. 직항로 개설을 요청하는 일본 지자체장에게 항공기를 띄워 손해 볼 가능성을 제기하면 편당 경제적 지원을 약속한다.


일본 지자체장들이 JAL이나 ANA 같은 자국의 항공사가 아니라 태양항공과 뉴스타항공 같은 외항사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은 한국 및 중국 항공사의 일본 지방 공항 유치를 통해 오늘날 일본의 관광수지 흑자의 기반을 놓았다. 한·중·일 3국 중에서 관광수지 흑자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


5월 일본의 황금연휴가 지난 어느 날이다.

사옥 로비 안내 데스크에서 김상도 과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상도 과장은 사무실에 실장과 차장 모두 부재 중이어서 거리낌 없이 큰 목소리로 통화했다. 덕분에 대화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일본 아오모리현 지사의 한국 방문단입니다. 김순오 전무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지금 부재중이니 국제업무실장을 만나려고 합니다.”

“국제업무실장은 지금 해외 출장 중이십니다.”

“그래요? 잠깐만요.”

잠시 통화가 멈췄다. 저쪽에서 여기 상황을 현 지사에게 보고하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지사님께서 차상급자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차상급자라고는 과장밖에 없습니다.”

“잠깐만요---. ---아, 지사님께서 과장님을 만나시겠다고 합니다.”

“근데 과장인 제가 지사님을 영접할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저라도 만나시겠다면 과장님 한 분만 올라오시면 좋겠습니다.”

저쪽에서 또 상황을 지사에게 보고하는 듯했다.

“그럼, 지사님은 여기 로비에 계셔야 합니까?”

“네, 잠깐만 기다리시게 하고 과장님만 얼른 올라오시면 좋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임호는 깜짝 놀랐다.


맨발로 뛰어나가 지사를 모시고 올라와야 할 판에 로비에서 기다리게 한다? 실장이 부재중이면 자기가 실장을 대표하는 차상급자인데, 뭐? 지사님을 영접할 지위에 있지 않다고?


김상도 과장이 임호를 불렀다.

“임 대리, 로비에 내려가면 아오모리현 지사 일행이 와있을 거요. 김순오 전무님을 만나러 왔는데 지금 안 계시나 봐. 대신 국제업무실장을 만나려 하는데 부재중이라고 하니 나라도 만나겠다는 거야. 이야기해놓았으니 아오모리현 지사님 말고 그중 과장 한 분만 모시고 올라오면 돼. 여러 사람 말고 꼭 과장 한 분만 모시고 오라고!”

“예---.”

임호는 나설 처지가 아니었다. 태양항공 후예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섣불리 나섰다가 봉변을 당하기가 십상이다.


임호는 갑자기 불안감이 생겼다. 현 지사면 일본의 고위 공무원이다. 로비에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기획실 임원이 만나도록 안배하든지 아니면 김상도 과장이 회사를 대표해서 지사를 접견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서 위로 보고해야 한다. 김상도 과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비로 내려가니 10명 정도의 일본인이 모여있었다. 무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니 김 과장과 통화한 사람이 임호에게 다가왔다. 그는 현 지사가 잠깐 올라가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임호에게 밝히고 재차 확인을 요청했다. 당연한 요청이다. 회사를 방문한 주체가 현 지사인데 그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수행원인 과장 한 명이 면담하러 올라간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지사를 모시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김 과장에게 전화했다.


“과장님, 현 지사께서 잠깐 올라가서 말씀 나누시겠답니다.”

“아니, 아까 이야기했잖아. 올라와도 만날 사람이 없다고. 잘 설명하고, 과장 한 사람만 모시고 올라와요.”

그는 짜증을 냈다. 실장, 차장이 자리에 없으면 자기가 부서를 대표하는 자인데 만날 사람이 없다고? 주인된 자라면 회사를 방문한 현 지사를 이렇게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임호는 지사를 로비에 세워두고 과장 한 명을 데리고 올라간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임호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 지사님을 로비에 그냥 기다리게 하고 과장 한 사람만 데리고 올라갑니까?”

“아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요? 엉?”

“예, 알겠습니다.”


임호는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에 지사님을 응대할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과장 한 사람만 모시고 오라는 말을 전했다. 과장 혼자만 임호를 따라 나섰다. 임호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지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임호는 손님을 김 과장에게 안내했다. 그는 김 과장을 만나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갔다. 지사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그가 돌아간 이후 임호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천둥 번개가 치다


임호는 다음 날이 월차 휴가였다.

하루 쉬고 이튿날 출근을 하니 김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임호를 급히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니 느낌이 좋질 않다. 그제 아오모리현 지사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임 대리, 아침에 김순오 전무가 찾을 텐데 가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세요.”

“예,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 그제 아오모리현 지사를 누가 가서 응대했냐고 묻기에 임 대리가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요? 뭐가 문제입니까?”

“내가 잘 설명했으니까 임 대리는 그냥 잘못했다고만 하세요.”

“---.”


김 전무에게 무얼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가? 김 과장이 시킨 대로 로비로 내려가 과장 한 명 데리고 온 것뿐이다. 김상도 과장은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았다.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든 말든 잘못 한 일이 없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오모리현 지사를 로비에 기다리게 한 것은 꺼림칙하다. 김 과장이 그렇게 시켰다고 해도 그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못한 것을 들어 죄를 묻는다면 그건 분명 임호의 잘못이다. 문제가 생길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이다. 너는 뭘 했어? 라고 묻고, 너도 똑같은 놈이야! 라고 한다면---. 임호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김 전무실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김 과장과 임호는 함께 6층 전무실로 올라갔다. 김 과장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임 대리, 다른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무조건 잘못했다고만 하세요. 내가 문제없도록 말씀 잘 드렸으니까---.”

“---.”

어떤 문제가 있었고 뭘 말씀을 드렸단 말인가?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김 전무실로 들어갔다.

방 안의 공기가 묵직했다. 다이너마이트라도 터질 기세다. 임호는 깊숙이 인사하고 그의 책상 앞에서 멀찌감치 거리를 좀 두고 섰다. 김 과장은 임호의 왼쪽 옆에 섰다. 고개를 90도로 꺾어 숙이며 유난히 안절부절못한다. 그의 모습이 애처롭다.

임호는 두 손을 모으고 서서 김 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 전무가 책상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임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니가 임 대리가?”

경상도 특유의 억양으로 매우 굵직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락없는 조직 보스의 풍채다. 목소리에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죄를 짓고 그 앞에 섰다면 바지에 오줌을 저렸을 것이다. 임호에게 물었는데 옆에 있는 김 과장이 움찔한다.


“예, 제가 임호입니다.”

임호는 아무런 동요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는 처음보다 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사님을 로비에서 기다리게 한 게 니가?”

“---.”

김 전무의 이 말 한마디에 비로소 임호는 사태의 본말을 파악했다.

임호가 걱정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그가 어제 하루 쉬는 동안 십중팔구 김 과장이 모든 책임을 임호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임호가 지사를 로비에서 기다리게 했고 과장 하나만 데리고 와서 자기가 면담했다고 보고했을 것이다.


임호는 김 과장의 처신에 기가 막혔다. 김 전무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멍하게 김 전무를 보고 서 있었다. 행여 임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 두려운 듯 김 과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급히 끼어들었다.


“전무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잘못은 임호가 했는데 상사인 자기가 그 책임을 지겠다는 투로 말했다.


갑자기 천둥 벼락이 몰아쳤다. 임호는 태어나서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김 전무는 오른손으로 뭔가 반짝이는 것을 집어 들고 임호에게 던지는 시늉을 하며 소리친다.


“야, 이 새끼야! 니가 뭔데 현 지사를 로비에서 기다리게 하노! 현 지사를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거야? 니가? 대리 주제에? 나 어제 너 자르려고 했어, 알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건물이 흔들렸다. 그가 집은 것은 크리스털 재떨이였다. 임호에게 집어던질 기세였다.

“---.”


임호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너무 코믹하게 느껴졌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고개를 숙이고 필사적으로 혀를 깨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공항에서는 권순천 대리에게 신입직원들 고충을 전달하다 회사를 그만둘 뻔했다. 지금 본사에서는 김상도 과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회사를 잘릴 지경이다. 둘 모두 태양의 핏줄이다.


상황이 더욱 험악해졌다. 김 과장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두꺼비처럼 앞으로 폴짝 뛰며 한 걸음 나섰다.

“전무님, 잘못했습니다. 제 책임이 큽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김상도 과장은 “부하 직원 교육을 잘못시킨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그가 정상적인 자라면, “임 대리는 제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지시한 저의 잘못입니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가 저지른 일은 그가 책임지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어렵게들 사는가? 그에게는 체면이고 책임이고 없다는 말인가? 태양항공에서 봇짐 들고 떠나올 때 들고 온 나그네 심정 뿐이라는 건가?

김 과장이 나서자 또 한 번의 천둥 번개가 실내를 흔들었다.


“당신은 더 나빠! 당신하고는 이야기하기도 싫어!”


김 전무의 뼈있는 호통에 김 과장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다 걸린 도둑놈처럼 그 자리에 고목처럼 굳어버렸다.


임호는 김 전무가 자신에게 호통을 쳤지만 김 과장의 거짓 보고를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잠시 후 분이 풀렸던지 김 전무는 다시 차분하고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 내 이번은 그냥 넘어간다. 나가봐라!”

“전무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김 과장이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임호 역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전무실에서 야단을 맞는 동안 임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무실을 나와 계단을 통해 한 층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침묵했다. 김 과장이 임호에게 말을 건다.


“임 대리, 수고했어요. 그래도 잘 끝났어요.”

잘 끝나? 임호는 그와 말을 섞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제 임 대리 쉬는 날 아주 난리가 아니었어요.”

“---.”

임호는 그가 입을 닥치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 싶다. 어제 난리가 났다면 오늘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비겁했다.


임호는 그날 이후 사전에 위험을 예방하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상사의 지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래에 위험 발생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반드시 그 위험요인을 상사에게 알려 이를 제거한 후 지시를 수행한다.


둘째, 상사가 동의하지 않고 지시를 강제하는 경우 이를 거부한다.


아무런 의사 표현 없이 명령을 수행하여 무능한 공범으로 연루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당한 지시에 대한 불복종으로 찍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태양항공은 아오모리를 세계로 연결하는 창(窓)이다


아오모리는 혼슈 북쪽 끝에 있는 도시로 한국과 대만 관광객이 많이 찾는 홋카이도의 삿포로와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아오모리는 우리에게 태풍이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수험생 사과로 잘 알려져 있다.


1991년 가을 일본 아오모리현에 태풍이 몰아쳐 수확을 앞둔 사과의 90%가 땅에 떨어졌다. 당시 사과 재배 농가의 많은 농부가 망연자실한 채 떨어진 사과만 보고 탄식하고 있었다. 그때 한 농부가 매달려 있는 10%의 사과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사과’라고 이름을 붙여 수험생들에게 팔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오모리는 이 농부의 성공 일화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아오모리현 지사가 뉴스타항공과 태양항공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지 몇 년이 지났다. 아오모리에 국제선이 없던 1995년 태양항공이 아오모리에 취항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코로나19 발병 이후 태양항공은 아오모리 운항을 잠정 중단했다. 2022년 8월 3일 일본 아오모리현 네부타 마쓰리 축제에서, 아오모리현은 코로나 이후 운항을 중단한 인천-아오모리 노선 직항편의 재운항에 대한 염원을 담아 태양항공 네부타를 제작해서 축제에 참여했다. 축제를 통해 태양항공의 아오모리 운항 재개를 요청했다. 행사에서 아오모리현 지사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태양항공과 인천공항은 아오모리를 세계로 연결하는 창(窓)입니다.”


이 말은 매우 축약적인 표현이다. 거기에는 항공에 대한 상식은 물론 관광에 대한 지혜도 담겨있다. 지자체장의 통찰이 묻어 있다.


아오모리 사람들이 동남아와 미국을 가려면 도쿄나 오사카로 이동을 해서 거기서 국제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그러나, 이제 아오모리에서 서울을 거쳐 태양항공 연결편으로 동남아와 미국으로 여행할 수 있다. 태양항공과 인천공항이 아오모리를 세계로 연결하는 창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한, 아오모리는 태양항공의 직항편을 이용하여 한국인 관광객을 아오모리로 유치하여 지역관광을 촉진한다. 자국의 항공사가 아니라 상대국의 항공사를 유치해서 상대국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니 지방도시의 관광수지 흑자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아오모리현은 사과 재배의 농부도 그렇고 현 지사도 그렇고 지역을 위한 지혜와 통찰이 뛰어나다.


김순오 전무는 아오모리현 지사가 뉴스타항공을 방문한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는 젊은 시절 일본 주재 상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서 일본어도 곧잘 하는 친일본 성향의 인물이다.


김상도 과장은 아오모리현 지사를 홀대해서 보냈다.


<<본문을 구성하는 내용과 인물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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