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 배분 격투기
노선 배분 격투기
태양항공과 뉴스타항공은 수익성 있는 노선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정부는 국가 간 항공회담에서 확보한 노선권과 운수권을 국적항공사에 배분한다. 노선권은 특정 노선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말한다. 운수권은 특정 노선에 여객 및 화물을 운송하기 위한 기재, 운항 횟수, 노선 운영 구조에 대한 권리를 말한다. 노선권과 운수권을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노선은 항공사의 매출에 직결된 것으로 항공사는 수익성 높은 노선을 확보하기 위해 회사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태양항공과 뉴스타항공은 신규 노선권과 운수권을 확보하기 위해 건교부 국제항공과를 사이에 놓고 줄곧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두 항공사는 고객을 사이에 두고는 서비스 경쟁으로, 건교부를 사이에 두고는 노선 배분 경쟁으로 맞붙었다.
노선 배분은 회사의 매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으로 경영진의 최대 관심사다. 경쟁사 대비 우월한 운수권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업무실, 기획실 등 주요 전략부서가 온갖 격투 기술을 여기에 집중한다. 이들은 노선 배분 시즌이 오면 상대 선수와 서로 치고받을 격투 전략을 세우고 링에 오른다. 심판의 판정 결과에 따라 두 회사의 선수들은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임 과장, 미안하다
뉴스타항공이 1997년 5월 서울-프랑크푸르트에 취항하기 얼마 전이다. 임호가 베이징 항공항천대학(航空航天大学)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국제업무실에 막 복귀하던 때였다.
서울-프랑크푸르트 노선에 대한 건교부의 운수권 배분이 있었다. 주기성 사장은 한·독 항공회담에서 정부가 확보한 서울-프랑크푸르트 운수권 주 4회를 전량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건교부는 주 4회의 운수권을 뉴스타항공에 주 3회 그리고 태양항공에 주 1회 각각 배분했다. 임원진은 이 배분 결과를 사장에게 적시에 보고하지 않았다.
국제업무실 임원은 해외 출장을 떠나면서 과장인 임호에게 사장을 수신으로 하고 관련 부문 임원을 참고로 해서 서울-프랑크푸르트 노선의 배분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뉴스타항공 본사는 1998년 김포공항 옆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회현동의 남산 3호터널 앞에 있었다. 사장실은 6층에 그리고 그 아래 5층에는 기획실, 국제업무실, 법무실 3개 직속부서가 한 층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사장은 언제라도 이 직속부서의 담당 직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현안을 물어보곤 했다.
6층 비서실에서 전화가 울리면 임호는 왼손으로 전화기를 쥐고 오른손은 최근 현안 파일을 잽싸게 서류함에서 빼내 책상 위에 펼쳐 놓는다. 사장의 하문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듯 평소 업무 소통이 있는바 과장이라도 사장에게 직보하는 부담이나 거리감은 없었다. 임호는 독일이 담당 지역은 아니지만 큰 부담을 느끼지 못했다. 건교부의 운수권 배분 결과를 있는 그대로 사장에게 사내 이메일을 통해 보고했다.
사장의 수신 확인이 뜨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회사가 난리가 났다. 사장이 임호 메일에 대한 회신 기능을 이용해 전 임원과 부서장을 참고 수신으로 하고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서울-프랑크푸르트 운수권 주 4회를 다 가져와도 모자랄 판에 태양항공에 주 1회를 주자는 나약한 정신상태를 용인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멍했다. 임호는 사장의 회신 메일을 보고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5층 복도 끝의 계단을 통해 2층 실내 주차장을 지나 1층 밖으로 내려왔다. 동양그룹 사옥은 금연 건물이었고 사내 흡연자들은 이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가 흡연을 하곤 했다.
이게 무슨 일일까? 건교부가 이미 배분을 끝내고 공표하였는데 이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지금 당장 과천의 건교부 국제항공과로 달려가 태양항공에 배분한 주 1회를 뺏어오란 말인가? 법무실을 통해 건교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란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장 나름대로 주 1회마저 찾아올 복안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나섰다는 것인가?
국제업무실 임원이 출장 가는 날 서울-프랑크푸르트 운수권 배분 결과를 사장에게 보고하라고 해서 보고했을 뿐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영문도 모르겠고 도저히 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업무실 임원은 내게 사장 보고를 지시하고 아침부터 해외 출장을 갔다. 국제업무실 실장은 1년 월급을 줄 테니 1년 동안 집에서 쉬라는 최고경영자 지시에 따라 업무에서 잠시 이탈한 상태였다.
임호가 베이징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동안 국제업무실은 서울-프랑크푸르트 전세편의 러시아 영공통과의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 보냈다. 항공기가 러시아 영공 통과를 하지 못하고 반대 방향의 항로인 태평양횡단항로로 운항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일로 국제업무실장은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다.
다음이 임호였으니 임호는 오로지 혼자 해결해야 했다. 장흥 억불산 중턱의 작은 논두렁에 홀로 버려져 세찬 바람 맞으며 어미 찾는 새끼 고라니의 모습이었다. 죽든지 살든지 회신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내려오던 길로 다시 올라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장님, 서울-프랑크푸르트 운수권 배분은 건교부가 공문을 통해 이미 확정 공표한 사실입니다. 다만, 사장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씀드린 부분이 있다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임호 과장 올림.”
하루해가 너무 길었다. “하루해는 너무 짧아요”라고 노래한 조용필의 하루는 어떤 하루였을까? 자리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컴퓨터만 뚫어지게 주시했다. 5시간 정도 지났을까. 수신 확인이 뜨고 바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사장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 과장, 이미 배분이 끝났냐?”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예, 끝났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아아아아무도 나한테 이야기 안 해 주고….”
절규에 가까운 긴 탄식의 외침이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고 또 침묵이 흘렀다.
“…임 과장, …미안하다.”
“아닙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임호는 사장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의 진솔한 성품에 감복했다. 임원으로부터 제때 보고를 받지 못해 발생한 자신의 판단 착오를 지휘 체계 저 아래에 있는 과장 2년 차 부하 직원에게 솔직히 사과하는 사장이 어디 있을까?
거짓으로 보고하는 것만 허위 보고가 아니다. 제 때에 보고하지 않고 지연한 것도 허위 보고다. 불안했던 회현동의 하루가 남산 3호 터널 속으로 느릿느릿 저물어 갔다.
<<본문을 구성하는 내용과 인물은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