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어학연수 하는 호사를 누리다
한·이란 항공협정에 서명하다
한·이란 항공회담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민항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란은 입국 시에 방문자가 원하지 않으면 여권에 입국 스탬프를 찍지 않는다. 여행자의 여권에 이란 입국 기록(스탬프)이 있으면 이란의 적성 국가인 이스라엘은 입국을 거절한다.
한·이란 항공회담은 최초의 항공협정 체결로 외무부 통상심의관이 수석대표를 맡았다. 회담 대표단은 외무부 조약과, 건교부 국제항공과, 태양항공과 뉴스타항공의 국제업무실 직원으로 구성하였다. 회담에서 항공협정의 전문 및 본문 20개 조항 그리고 부속서의 노선구조에 대해서 합의하고 가서명하였다. 노선개설에 필요한 운항 관련 사항은 이후 항공 당국 간 협의하기로 하였다.
외무부 수석대표는 회담 대표단을 모아놓고 양국이 합의한 항공협정 서명란의 각자 이름 옆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임호는 한·이란 항공협정의 공식 명칭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에 주목했다. 국가 간 항공협정은 주권과 운수권을 다루는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으로 국회의 비준 동의 절차를 거친다.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 재가를 받은 후 국회의 승인으로 공식 발효한다. 명칭이 일반적이지 않으면 심의, 승인 과정 중에 행여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이를 정정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서명을 보류했다.
건교부 국제항공과 김승권 과장이 나선다.
“임 과장, 여기 계신 분들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데 왜 혼자만 그럽니까?”
“협정의 공식 명칭이 일관성이 없고 특정 종교성을 표방해서 그렇습니다.”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협정 명칭 끝에 ‘in the Name of Allha(알라신의 이름으로)’가 붙은 것이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임 과장, 예수 믿어요.”
“예, 크리스천입니다.”
“이거 가만 보니까 신앙 때문에 서명하지 못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서기관님, 신앙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국 심의 과정 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만 해요. 서명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그럴 것 같으면 다음 항공회담부터는 참석하지 마세요.”
김 서기관은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다혈질이다. 뉴스타항공 박관식 부사장도 그를 만나면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네, 서기관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부사장도 그 앞에서는 눈치만 보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상황이 그러하니 국제업무실 일개 과장 정도야 가소로울 것이다.
임호는 항공사를 대표해서 회담에 참석했는데 의견 한마디 냈다가 건교부 서기관에게 혼쭐이 났다. 운수권 배분 권한을 가진 건교부는 갑이다.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임호는 입을 닫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외무부 통상심의관이 천천히 일어섰다.
“다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통상심의관은 외무부 조약과 조규성 사무관을 대동하고 호텔 룸을 나갔다. 약 20분쯤 지났을까? 협정 명칭에서 ‘in the Name of Allha’라는 부분을 삭제한 협정문을 들고 돌아왔다.
“방금 이란 측 수석대표와 체어맨스 미팅(Chairman’s meeting)을 했습니다. ‘in the Name of Allha’ 문구의 삭제를 요청했어요. 이란은 그 문구가 없으면 의회 승인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란 측 협정문에는 ‘in the Name of Allha’를 존치하고 우리 측 협정문에는 삭제하는 걸로 합의했어요. 이제 협정문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임호는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고 바로 행동으로 옮긴 외무부 수석대표의 리더십에 감동했다. 그는 임호가 제기한 문제를 인식하고 즉시 바로잡았다. 건교부 김승권 서기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임호는 한·이란 항공협정의 서명란에 서명했다. 그호는 자신이 세운 원칙대로 “첫째,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설득하고, 둘째, 수용하지 않으면 이행을 거부한다”를 실전에 적용했다.
대강의 사정은 이렇다:
항공협정의 공식 명칭은 어느 나라나 예외 없이 공통의 형식을 취한다. 한·미 협정을 예로 들면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의 항공운송협정’이 공식 명칭이다. 이것의 영문 공식 명칭은 ‘Air Transport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다. 협정 체결 상대국에 따라 국가의 이름만 달라질 뿐 여기에 다른 군더더기 표현을 추가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한·이란 항공협정의 공식 명칭은 달랐다. ‘in the Name of Allha’가 공식 명칭에 추가되었다. 이란은 국민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신봉하여 저 명칭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태국이 불교를 신봉하는 국가라고 해서 한·태국 항공협정에 ‘in the Name of Buddha’를 추가해야 하는가? 사소한 것으로 보이지만 통상적인 관례를 벗어난 것이어서 정부 및 국회의 심의 과정 중에 문제 발생의 소지가 있다.
문제를 인식한 임호는 정정을 요청했다. 두 나라의 수석대표가 재협의하여 이란 측의 협정문에는 ‘in the Name of Allha’를 존치하기로 하고 우리 측 협정문에는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김승권 서기관은 항공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뉴스타항공 박관식 부사장과 임원들을 만나면 임호 과장을 항공회담에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건 말건 임호는 그 이후에도 항공회담에 참석했다.
베이징에서 어학연수 하는 호사를 누리다
1996년 임호는 과장으로 진급하고 그해 9월 베이징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본사 교육부에서 작년부터 매년 3명씩 선발하여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보냈다. 임호는 2차로 선발되어 8월 하순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 해정구 학원로(海淀区 学院路)에 소재한 베이징항공항천대학(北京航空航天大学)에 등록하고 9월 학기부터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임호는 숙소를 우선 학교 기숙사로 정했다. 외부에 방을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독방을 하나 임차해 사용했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밤이면 어느 방에선가 남자의 숨넘어가는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밤새 그칠 줄을 몰랐다. 며칠 후 그 기침 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일본 유학생이 폐렴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아프면 빨리 병원엘 갔어야지---. 타지에서 죽어간 그 학생의 명복을 빌었다.
임호는 기숙사에서 한 달을 살고 학교 인근의 아파트 단지인 동왕좡(东王庄)으로 거처를 옮겼다. 방 2개에 주방과 샤워실 그리고 작은 거실로 구성된 아파트다. 월 3,000위안에 5개월 임차했다. 3,000위안이면 당시 환율로 한화 30만 원 정도다. 기숙사의 열 배 수준이다. 방마다 침대와 책상이 있고 냉장고, 장식장과 TV가 설비되어 있어서 몸만 들어가면 바로 생활할 수 있었다.
아파트 내부 구조는 특이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주방이 있다. 문과 주방 사이에 대리석 타일이 깔린 복도가 양옆으로 길게 깔려 있다. 복도의 왼쪽 끝에 작은 방이 하나 있고 오른쪽 끝에 큰 방이 하나 있다. 주방과 오른쪽 방 사이는 샤워실과 거실이 순서대로 이어져 있다.
만나는 사람들이 어디에 사냐고 물으면 임호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쪽 문옆에 자전거가 있는 집에 산다고 말한다. 복도가 길어 양쪽 방을 왔다 갔다 하려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너스레를 떤다.
동왕좡이 있는 우다오커우(五道口) 지역은 한국 및 일본 유학생이 많다. 미주, 유럽 지역의 유학생들도 적지 않다. 우다오커우 인근은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베이징항공항천대학, 중국농업대학 등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항공·우주 계열 연구기관의 거점지역이다.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아니면 대학 진학을 위해 어학연수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이 이 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베이징항공항천대학의 어학연수 프로그램은 9월 초부터 시작했다. 한 반 수강생은 15명 정도였으며 대부분 생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현지 대학 진학을 위해 언어 자격을 갖추려는 예비 대학생들이다. 임호를 포함해 5명은 국내 기업에서 어학연수 온 직장인들이었다.
9월 가을 햇살이 간지러운 작은 교실에서 들뜬 가슴으로 첫 수업을 맞이했다. 금방이라도 현지인처럼 중국어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임호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다른 세상에 있었다.
사면이 벽으로 막힌 사무실. 서류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노선별 수송실적 집계하느라 액셀을 끼고 사는 김태산. 모든 실적 분석은 그에게서 나온다.
팔짱을 끼고 서류를 들여다보다 잠들어 버린 김상도 과장. 그 뒤에 앉은 구재선 차장이 내선으로 그의 책상 전화벨을 울린다. 벨소리에 놀라 깬 김상도가 입가에 침을 닦으며 급히 수화기를 들어 귀로 가져간다.
“여보세요.”
“뚜우---.”
구재선 차장은 김상도가 깬 것을 보고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눈치를 챈 김상도는 수화기를 얼른 내려놓고 바삐 서류를 뒤적인다.
매일 아침 30분 늦게 출근하는 강호기 과장. 실장의 눈치도, 임원의 눈치도 보지 않는 강심장의 소유자다. 모든 일에 일단 ‘노’부터 말하고 본다. 상사건 부하건 미간을 찌푸리며 화난 얼굴로 소통한다. 싸우지 않은 직원이 없다. 김상도가 30분 늦게 사무실로 들어오는 그를 놀린다.
“형님, 매일 아침 형수랑 그거 하고 나오느라 30분씩 늦죠?”
“하하하.”
직원들 모두가 웃고 말았다. 실장도 뒤에서 “허허허”하고 웃는다. 30분 늦게 사무실로 들어오는 강호기 과장에게 김상도가 농을 걸었다. 강호기 과장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그 둘은 태양항공 국제업무실에서 함께 넘어온 동료다.
본사 사무실의 분위기는 이곳 대학 강의실과 공기부터 다르다. 임호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변화 없는 직장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업무에서 벗어나 외국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호사를 누리니 감개무량하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우다오커우 식당가를 찾는다. 양 많고 저렴한 가격에 맛도 좋은 중국 로컬 식당. 삼겹살과 다양한 찌개 종류로 고향의 맛을 전하는 한국 식당. 라멘과 돈부리, 스시의 일본식당. 피자와 파스타, 스테이크의 양식당. 모두 넉넉한 맛을 제공하며 문을 활짝 열어놓고 유학생들을 기다린다.
유학생들은 시계가 자정이 넘어 새벽 두세 시를 가리켜도 아직 할 이야기들이 많다. 집에 갈 생각들을 않는다. 집 떠나 타국에서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 생활하니 몸과 마음이 자유롭다. 시간을 지켜 귀가해야 하는 부담도 없다.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기대 속에 청춘의 하루하루가 익어간다. 임호는 어두울 때 출근하여 캄캄할 때 퇴근하는 고단한 서울의 직장생활과 비교해 본다. 항공기로 2시간 좀 넘게 걸리는 이곳 베이징 우다오커우의 유학 생활은 그야말로 별천지다.
너무 야박하게 하지 마세요
동양그룹 총수의 인재양성에 대한 비전은 국가와 청년을 향한 애정을 담고 있다. 뉴스타항공은 베이징 어학연수뿐만 아니라 영미권 대학의 MBA 과정도 지원한다. 국제업무실에서 두 명의 직원이 미국과 캐나다 대학에서 MBA 과정을 졸업했다. 기획실 및 영업부문에서도 인재들이 유학의 영광을 누렸다.
회장부속실 임원은 회사가 지원하는 해외 MBA 과정 지원 대상자들이 졸업 후 일정 기간 퇴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서약서를 쓰도록 하겠다는 보고를 올렸다.
“회장님, 해외 MBA 교육 대상자들은 졸업 후 5년 이내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 교육비용을 전액 반환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회사에서 돈을 들여 인재를 육성하면 그가 설사 그만둔다 해도 이 나라 안에 있어요. 이 나라 어디에선가 국가를 위해 그가 배운 역량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보람 있는 일을 한 겁니다. 너무 야박하게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높으신 뜻을 몰라 송구스럽습니다.”
동양그룹 주성호 회장은 명문 예일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선진적 사고와 행동은 동양그룹 곳곳에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91년 국내 최초로 전 사업장을 금연 구역으로 선포하였다. 1995년 뉴스타항공이 운항하는 전 노선에서 세계 최초로 기내금연을 실시하고 기내 면세품목에서 담배를 제외했다. 사옥 로비에 도서관을 비치하여 직원들이 원하는 책을 언제든지 독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전 직원에게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해서 9시까지 한 시간은 개인 스스로 공부하도록 했다. 이 시간에는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일을 시킬 수 없다.
국제업무실 김태산 대리가 주성호 회장에게 제안했다.
“회장님,
토요일 12시에 지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사무실로 올라오면 오후 1시부터 퇴근 시간인 2시까지는 업무 효율성이 현격히 떨어집니다. 반면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사와 사무실 전기는 비생산적인 비용지출로 경제적 비효율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비생산적 비용지출과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은 그룹 전체의 비용 효율성을 저하할 우려가 있습니다. 토요일 12시 퇴근을 건의드립니다.
국제업무실 김태산 대리 올림.”
주성호 그룹 회장은 김태산의 제안을 받아들여 토요일 오후 2시에 퇴근하던 것을 12시 퇴근으로 앞당겼다.
<<본문을 구성하는 내용과 인물을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