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븐 예열 시작합니다.

by 치케

한국에 온 지 10년.

향기로운 꽃 같은 나이에 말 그대로 불같은 열정으로

20대를 보냈다.

보수적이고 젊은 꼰대 같았던 나는

'사서 고생'을 해야 얻어지는 열매가 달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치열했고, 욕심이 많았고,

몸이 아파도 아픈 줄 몰랐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

잠을 자지 않고서라도

내일에 대한 걱정은 끊임없이 할 수 있었던.


젊었지만 피곤했고

눈물 젖은 빵까지 입속으로 욱여넣고 다시 일어나는

그런 20대를 머나먼 미국의 뉴욕이라는 곳에서 보냈었다.


애증의 도시 뉴욕.

뉴욕이 배경인 영화를 볼 때면 미치도록 그립다가도

피도 눈물도 없이 인정사정없었던 그 도시를 생각하면 미웠다.


단 하나의 꿈을 위해

그토록 원하던 요리학교에서

과자집에 푹 빠진 헨젤과 그레텔처럼 베이킹에 푹 빠져있던 시절.

학교밖 현실로 내던져졌을 땐 말 그대로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치며 싸우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두 끝날 때까지 버텼다.


나의 유학생활을 통틀어 되돌아보자니

화려했던 뉴욕과 학교의 모습과는 다르게

가족들의 기대와 우려를 한 짐 가득 등에 싣고 시작한

순례길 같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곳을 떠난 지금의 내 가슴에는 미련과 애증이 남았다.

그리고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전업주부의 길을

약 10년간 걸으며

내게 던져진 공허함과 허탈함이 더해져 마음이 더욱 무겁다.



어제 나는 8년간 친정집 방 한 칸에 묵혀두었던 짐들을 정리했다.

어마어마한 도구들, 학교 다닐 때 쓴 수업필기노트들, 직장에서 옮겨 적어놨던 레시피들,

수집한 책들과 잡지들, 사진들 이 모두가

그동안 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덤덤히 모습을 드러냈다.


15평의 신혼집에서도 뭔가를 해보겠다며 아버지와 함께

냉장고만한 오븐을 옮겨왔었는데

아기가 태어나고 살림이 늘어나자 나의 자랑이던 커다란

오븐은 처치곤란 짐덩이가 되었고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사드린 아버지의 새 차 뒷좌석에

굳이 스크래치까지 내어가며

애물단지처럼 욱여넣어진 채로 친정집으로 환송되었었다.


각종 도구가 많이 필요한 베이킹특성상 많은 짐들이 항상

날 따라다녔다.

나는 수집병도 있었으니 눈에 보이는 짐은 마음의 짐만큼

무거웠다.

나는 매 순간의 기록을 늘 끌고 다녔다. 미련이었다.

당장 사용하지 않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둘 수는 있었다.

하지만 버릴 순 없었다.

이 짐들을 모두 정리하는 순간

나의 커리어는 그대로 먼지가 되어 소멸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역사적인 2025년 12월 말, 드디어 이사를 간다.

나를 꽁꽁 묶어두었던 그늘에서 벗어나

중심에서 외곽으로

누군가의 시야 안에서 시야 밖으로

전쟁 속에서 평화를 찾아

그렇게 조금 더 숨통이 트이는 곳으로 간다.

묵었던 나의 짐들은 재정비해서 나와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내 손때가 묻은 것들과 다시 함께 간다는 것,

이것은 내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산소호흡기를 달게 된 숨 쉬는 생명체가 된 것처럼

어두웠던 방안에 불이 켜진 것처럼,

나는 내 커리어, 내 미래의 불씨가 살아난 것과도 같은 희열을 느꼈고 희망을 보았다.

그런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았던 엄마는

곰팡이 가득 머금은 해묵은 짐들을 보고 그동안 흘려보낸 세월이 서러워 내가 울까 봐

며칠 내내 그 모든 짐들을 깨끗이 씻고 말리고를 반복하셨다 했다.

무릎이 성치 않은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엄마의 눈엔

먼지 가득 쌓인 도구들을 보고

마치 내가 아이처럼 주저앉아 펑펑 울까 봐

서둘러 닦아내면서도 깨끗해진 오븐과 도구들을 보고 마음이 뿌듯했다고 하셨다.

이거라도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엄마라도 아직 쓸만하지?" 하며 빙그레 웃으셨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기는...."


항상 내 기준에 말이 안 되는 말만 하는 엄마.

꼬박꼬박 엄마가 보내주던 학비,

그 속에 같이 동봉되어 보내지던 노모의 고단함을 한순간도 허투루 쓸 수가 없어서,

만약 허투루 쓴 시간이 있었다면 속죄하고 싶어서

나를 갈아가며 이 악물고 버텼던 시간들이었는데

내 이름 석자로 살지 못하고 누구의 엄마로 살고 있는 내가

누군가의 엄마로 열심히 살아온 나의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다.

나에게 전업주부는 그런 무게의 직책이었다.


물론, 일도 하고 육아도 잘하고 살림도 잘하는 엄마들도

분명 많지만

내가 선택한 결혼은 '좋은 엄마'가 되기를 강요받는 환경이고

나에게 주어진 캐파는 이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벅찼다.


넌 잘하고 있다고

늘 나를 위로만 하던 엄마가

상기된 얼굴로 이것저것 야무지게 짐을 챙겨놓는 나를 보며

천천히 하라며, 쉬어가며 하라며

갓 구운 고구마와 커피를 들이밀며 배시시 웃는다.



엄마,

참고 참았더니 시간이 흘렀어.

그리고 나니 엄마말대로 다 이렇게 알아서 때가 되네.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고마워..

행복하게 살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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