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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정 Mar 01. 2018

침사추이 (1)

도시에서 쓰는 시놉시스


침사추이(Tsim sha tsui)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멋진 ‘인생의 주제가’를 틀자. 비디오아트의 주인공처럼, 복잡한 거리를 걷자. 방황을, 낭만을, 열망을 노래하자.

     

문턱이 닳도록 지나다녔던 네이든 로드에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을 떠올려보라. 아니면 왕가위의 필름이 가진 미학적 장면을 생각해보라. 홍콩은 거대한 영화이며 비디오아트다. 단번에 설명하기 힘든 흡입력이 있는 것이다. 간판의 화려한 색감들, 떠다니는 큰 글자들, 빛나는 것들, 창문이 빼곡히 박혀있는 건물, 변덕스러운 날씨, 바쁜 사람들과 온갖 냄새들.


오래된 간판들 오래된 사진


침사추이는 흡사 간판들의 도시라고 해도 무방했다. 지나가는 버스 머리에 부딪칠 듯이 도로 한가운데로 툭 튀어나온 간판들은 하늘도 가려버렸다. 번체와 간체, 영어가 섞인 대형 간판들이 붉은 조명에 의지해 다닥다닥 붙여져 있는 모습은 이방인에게 두통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영어와 대륙의 말이 섞여 들리는 인파의 틈으로 “짝퉁시계 있어요.” “롤렉스 루이비통.” “싸게 팔아요.”하는 말도 들린다. 전 세계의 말을 다 안다는 기름국 청년들의 목소리다.


청킹맨션 앞


외국인만 취급하는 명품 부티크 한편에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와 국수집들이 즐비하다. 층층마다 낀 회색의 때와 튀어나온 철근 위로 빨래가 걸려 있는 모양은 흡사 장국영과 장만옥이 나왔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노상의 튀김집에서 나오는 기름진 냄새, 모로코 사원 지붕위에 앉아있는 새들, 부동산에서 나온 직원들이 던지는 전단지는 침사추이 거리의 상징이다. 해가 지면 도시 전체에는 신식 홍등이 켜진다. 네온사인 간판이다. 대형 건물들과 골목의 남루한 모습이 홍등과 홍등으로 이어져 한 마리 용처럼 밤새 꼬리를 흔든다.


침사추이 그리고 간판


홍등은 붉다. 어느 때 까지나 지구상에서 가장 붉다

붉다는 것은 속에 있는 것. 붉은 것은 사창가와 유곽의 조명부터 도살장과 정육점으로 이어지는 연상을 가졌다. 여배우의 우아한 붉은 입술도 어린 소녀가 손끝에 물들이는 붉은 꽃물도 꼭 같이 붉다. 도시에 홍등이 다 내어 걸리면 식당은 더 이상 음식을 팔지 않는다. 신사들은 넥타이를 풀고 고층에서 내려오고, 낮잠을 자던 이민자 처녀들은 가장 높은 구두를 신고 나온다. 노인들은 후미진 구석에서 잊힌 광동 가요를 부르고, 인도인들은 청킹맨션의 불안함을 고조시키며 두리번 거린다. 이런 침사추이 도시의 밤은 이방인의 카메라 앞에 야경으로 불리며 엽서처럼 간직된다.


비 오는 어느날, 부동산과 구인광고와 콘서트 포스터


도시에는 시계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 일곱 시와 새벽 한시의 풍경이 그대로다. 그 어떤 언어로도 원래의 발음을 할 수 없이 변형된 이름의 이 도시는 시간이 멈춘 지 오래다. 아직도 나무문으로 된 60년대식 엘리베이터가 건물 안에 살아있다. 중국으로부터 이민을 와 아무것도 개척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How are you'를 반복해 연습하는 사람들, 황금을 캐러 왔다가 길을 잃은 90년대의 젊은이들, 좋은 집은 모두 차지해버린 백인들이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산다. 3원짜리 전차와 손에 꼽히는 외제차, 최저임금을 일당으로 받는 식당의 종업원들, 수천만 달러를 쥐락펴락 하는 금융인들이 함께 섞여있다. 그 누구도 지금이 몇 년 인지, 누가 누구이고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신호등을 건넌다. 신호등은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하며 모스부호 두드리는 소리를 낸다.


더원몰에서 내려다본 비오는 날의 교차로


이건 어디까지나, 홍콩에 대한 나의 확장된 감상이다. 사실 침사추이는 명동과 다를 바 없는 북적이는 상권이다. 홍콩 안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이며, 물가 역시 조금 더 비싼 곳이다.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민박과 에어비엔비가 몰려있고 홍콩에서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을 모두 침사추이에서 해결할 수 도 있다.


침사추이는 페리를 타고 마카오로 나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가장 큰 쇼핑몰이 있고, 상징과도 같은 레이저 야경 쇼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빨간 택시와 네온사인은 홍콩 도시의 상징과도 같다


다만 오래 된 건물 안에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가게들이 늘어서 정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침사추이 B2 출구 앞에 있는 ‘해천당’의 거북이 젤리는 따뜻하게 먹어야 한다. 따뜻한 젤리는 광동인이 건강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광동호텔 근처 꼬치 집은 수십 년은 닦지 않은 듯 한 그을음과 여기저기 튀어있는 소스 자국 때문에 초보 관광객은 쉽게 도전하지 않는다. 밤에만 여는 이 꼬치집에서는 흡사 취두부 같은 냄새가 나지만, 수트를 입은 신사도 그 앞을 지나치지 못하고 두 팔을 걷은 채 돼지곱창 꼬치를 들고 먹는다.


그 많던 첨밀밀 노래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영화 첨밀밀에서 장만옥과 여명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거리는 침사추이의 캔톤로드다. 영화를 찍었을 당시의 거리풍경은 없지만, 하버시티 앞 도로를 지나가는 자전거를 발견한다면 가슴이 뭉클해 질 것이다. 침사추이는 홍콩에 방문할 때 마다 지겹도록 있는 곳이었다.


더 원 몰은 침사추이에서 가장 찾기 좋은 약속장소다. 몰 안에는 홍콩 패션브랜드 초콜릿 매장이 크게 있고, 아래에는 수입품을 파는 슈퍼마켓이 있다. 전망 좋은 카페와 바가 꼭대기 즈음에 있다. 더원몰 슈퍼마켓에서는 값비싼 일본 수입품이 많다. 홍콩인 누가 여기에서 쇼핑을 할까 싶다.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맥도날드


침사추이는 복잡하다. 많은 출구가 있고 골목길이 있다. 간판이나 상호마저 비슷한 느낌이라 자칫 잘못하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카메론로드 쪽으로 가다 보면 ‘찰리브라운 카페’가 있다. 거품 위에 스누피 9가지 그림 중 선택해서 그려주는 카페다.


찰리브라운 카페


스누피가 누워있는 듯 한 미트 라이스와 스누피 커피는 때때로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찰리브라운 클래식 만화영화 장식물들이 원목, 동, 분수 등으로 되어 있다. 흡사 옛날 미국 저택 같은 분위기로 꾀 우아하게 꾸며진 곳이다. 어린이 카페처럼 생일파티 룸도 있고 스크린에 스누피도 상영 중이다. 만화책을 꺼내보다 보면 미국 동요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스누피 찰리브라운 만화영화 속에 쏙 들어온 듯 한 기분이다. 그러나 찰리브라운 카페의 백미는 바로 카운터 옆 창가자리다. 창밖으로 보이는 침사초이 어지러운 거리와 찰리브라운 간판은 내가 꼽는 홍콩 뷰 열손가락 안에 든다. 십년쯤은 된 곳이다. 이 빠진 간판은 몇 년 째 고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더욱 매력 있다.


구롱공원 수영장


그나마 구룡공원이 있기에, 침사추이 주민들은 숨을 쉰다. 인구밀도가 최고 수준인 침사추이 주민들의 쉼터인 이 곳에는, 20불 내외로 입장이 가능한 수영장이 있다. 공용 수영장이지만 실내와 실외가 모두 널찍해 돈이 아깝지는 않다. 물에는 푸르름이, 밖에는 높은 빌딩이, 중간에는 구룡공원의 풀숲이 있다. 서양인 관광객은 구룡공원을 지나다가 수영장을 내려보며 가끔 셔터를 누른다. 침사추이의 밤문화라고 꼽히는 너츠포드 테라스는 단지 네 다섯 개의 펍이 골목에 모여 있을 뿐이다. 물담배 연기와 맥주 거품이 거기에 있다.

     

너츠포드 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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