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라진 도시, 구룡성채
이 페이지는
지금은 사라진 홍콩의 반쪽,
'구룡성채'를 추모하는 아주 사적인 일기장입니다.
홍콩을 알면 알수록 흠모하게 되는 정체가 있다. 지금은 사라진 구룡성채(九龍寨城), 그 뜨겁고도 강렬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나를 홍콩으로 더 깊숙이 이끈다. 구룡성채는 조금 더 은밀하고 그로테스크하게 홍콩에 대해 가르쳐준다.
어쩌면 ‘여행한다’는 것은, 단 한 컷의 찰나에 매료되어 시간과 비용과 정력을 소비하는 일이다. 구룡성채는 ‘미지의 마을’이기에 더욱 절실하다. 가볼 수 없어 더욱 애탄다.
홍콩 역사상 가장 어두운 거점지
구룡성채는 19세기부터 구룡지역에 있었던 요새였다. 성채의 벽은 두껍게 올라갔다. 영국군이 이 곳을 감시했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아닌 중국 소유로 남아있었던 곳이지만 전쟁 이후 빈껍데기처럼 남았다. 부랑민이나 이민자들이 말 그대로 ‘들끌었다’. 점점 건물을 높여야 했다. 한 사람 겨우 다닐만큼의 길목만 놔 둔채, 방을 짓고 또 지었다. 결국 아래층에선 하늘을 보기 어려웠다. 194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약굴, 무법지대, 슬럼가가 되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올리기 시작한 고층, 팽창한 인구는 수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냈다.
구룡성채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지만, 마치 하나의 쓰레기더미처럼 보였다. 여러 건물이 오래된 나무들처럼 딱 붙어 하나의 돌 덩어리 같은 모습을 이룬 것이다. 몇 백 명이 살기에도 좁은 공간에서, 3000명이 넘는 사람이 바득바득 붙어살았다. 지금 대한민국 서울에 11억 명이 들어와 산다고 가정하는 것과 맞먹는 수치다.
구룡성채는 마치 쓰레기장처럼 버려져 있었다.
홍콩정부는 구룡성채를 돌보지 않았다. 중국 역시 구룡성채 지역을 관할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정부 상태의 ‘버려진 땅’이었던 것이다. 구룡성채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로 나가지 못했다. 도시인조차 그 곳을 찾을 생각을 안했다. 완벽한 치외법권이었다. 홍콩 당국조차 손을 놓고 있는 통에, 구룡성채는 마피아와 조직의 점거지였다.
그러나 구룡성채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허리를 필 수 조차 없는 낮은 천장의 집은 중국에서 온 난민이나 홍콩 빈민들이 작은 나라를 이뤘다. 그 안에는 유치원도 있었고 교회도 있었다. 거위고기를 굽는 정육점과, 이발소 그리고 가장 성행했던 불법 치과들이 있었다.
더러는 구룡성채에서 태어나 그 곳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홍콩 침사추이의 멋스러운 해변가 풍경이나, 외국인들이 몰려와 영어를 쓰며 커피를 마시는 우아한 아침식사를 알지도 못한 채, 구룡성채라는 세계 안에서만 지냈다.
슬프게도 구룡성채는 이미 붕괴되고 없지만, 몇몇 사진집이나 다큐멘터리가 그를 기억한다. 지금은 공원으로 변해버린 옛 성채 터만이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