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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정 Feb 26. 2018

그럼에도 청춘은 꽃핀다

6. 젊은 홍콩


많은 이들에게 홍콩은 ‘중경삼림’의 장면이나 ‘영웅본색’ 시절의 이야기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러나 주윤발인 늙고 장국영이 떠난 것처럼, 홍콩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중국 반환 이후 잠시 침체되었던 분위기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며 다시 활기를 되찾는 중이다.


기적이 필요한 찰나에 만난 초이훙


그로테스크한 홍콩 거리를 걸으며 ‘방황 무드’에 실컷 젖어보는 것도,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다 우연히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교복의 학생들을 만나면, 마음이 급속도로 산뜻해진다. 초이홍은 그렇게 가장 ‘어린 홍콩’의 무드로 다가왔다.


좁은 아파트촌의 쪽빛 하늘이 아닌, 푸르고 높은 창공의 와이드 샷.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아파트와 농구코트의 신선한 기운. 그리고 그 위를 뛰어다니며 웃는 홍콩 아이들. 주택가와 작은 동네시장 하나가 전부일 뿐이던 초이홍이 1020 세대의 성지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싱그러운 기운’을 지닌 유일한 동네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초이훙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초이훙 에스테이트’ 지역 아파트 공용주차장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그 곳에 가서 두리번거리면 동네 주민들이 저절로 주차장 옥상 길을 안내해 줄 정도다. 내리쬐는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는 넓은 주차장 옥상은, 농구대 몇 개와 야자수 나무, 농구코트 페인팅으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를 뿜는다. 초이훙은 말 그대로, 무지개라는 뜻이다.



성채의 우울함을, 무지개빛으로 페인트칠하다


10대의 청춘들이 가득 모여 파스텔 빛 아파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농구를 하고 있는 모습은, 사춘기 영화 같은 풍경이었다. 아파트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게 뭐 그리 대단해 보이겠냐만은, 은은한 무지갯빛 파스텔톤으로 칠한 아파트와 야자수 몇 개, 농구 코트의 만남은 셔터속에서 색다른 청량감을 선사한다.



초이홍의 매력은 ‘거리감’에 있다. 모든 것이 한 자리에 있는 듯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굉장히 멀고 또 높게 느껴진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둘 셋씩 짝을 지어 있는 여자아이들에게 ‘나 한국 사람인데, 사진 한 장만 찍어줄래?’ 했더니 펄쩍 뒤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나 한국 너무 좋아해! 우리 같이 사진 찍자!’ 홍콩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아무도, 홍콩 영화 전성기를 기억하지 않는다. 초이홍의 무지개빛 아파트는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회색빛의 개미굴에 살지 않아요. 우리가 화사하게 페인트 칠 했는걸요’. 




D2 Place, 간판의 새로운 미래


지금 가장 새로운 ‘홍콩 배경’이 탄생했다. 특별한 여행사진이나 홍콩 정취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D2 플레이스의 옥상을 찾아야 한다. 소문을 듣고 온 홍콩의 젊은이들과 중국의 관광객이 벌써 와 있었다. MTR의 라이치콕(Lai chi kok)역 D2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이곳은, 10대들의 성지가 되었다. 오피스와 쇼핑몰이 있는 이 빌딩은 라이치콕 지역의 새로운 돌파구다. 옥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서 내려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배수관이나 어두운 복도를 산뜻한 벽화로 꾸몄다. ‘EVERY WHERE IS YOUR PLAYGROUND'. 어쩌면 이 곳을 찾는 모든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D2 플레이스 옥상의 가치는, 가만히 앉아 있을 때 그리고 사진을 찍었을 때 나온다. 고동색과 파란 창문으로 된 빌딩은 솟구치는 뱀 같다. 이 거대한 뱀 아래로 까마득한 높이가 느껴진다.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와 뻥 뚫린 공기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곳곳에 의자가 놓여져 있어서 꾀 괜찮은 풍경을 공짜로 누릴 수 있다. 홍콩에서 루프탑을 즐긴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 곳은 그저 ‘개방’ 되어있다.


이곳의 백미는 바로 네온사인 간판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네온사인으로 된 광동어 간판이 차례대로 쭉 놓여있다. 뱀 같은 아파트, 탁 트인 하늘 사이로 컬러풀한 네온 사인이 반짝인다. 이런 건 홍콩에서 처음 보는 풍경이다. 광동어 한자로 된 겨우 다섯 개 뿐인 네온사인 간판의 힘이 얼마나 큰지, 시계탑이나 유명 불상을 보고 온 것 보다 더 큰 감상을 제공했다.



찌는 듯 한 더위도 방해되지 않았다. 그 곳에 있는 젊은이들은 오직 셔터만 누를 뿐이었다. 네온 간판은 꾀나 컬러풀해서 마치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와 있는 느낌도 선사한다. 간판에 쓰여 있는 말은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무언가 오랜 시간 생각하게 만든다. ‘아주 맛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일찍 보내줄 수 없어’ 등의 의미다. 홍콩 복잡한 도심을 가득 채운 것이 간판인데, 또 여기까지 와서 간판을 보겠냐고 묻겠지만 분명히 이 곳의 간판은 다르다. 단지 네온사인 간판 몇 개를 가져다 놓았을 뿐인데. 그 뒤에 있는 환상적인 건물과 하늘의 콜라보를 예견한 눈썰미를 가진 홍콩인의 감각에 찬사를 보낸다.



청춘이 움직이는 곳


D2 플레이스는 오픈 초기라 아직 한산한 느낌이지만, 2층에 자리 잡은 엔티크 샵 ‘Vintage Maze’는 마치 해적선의 보물창고처럼 꽉꽉 채워져있다. 구입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 수집의 양과 다양한 물품에 놀라게 된다. 내놓으라 하는 편집숍이 많은 홍콩이지만, 규모나 퀄리티 면에서 월등하다. 누군가 단 한곳의 편집숍을 추천하라면, 바로 이 곳이다.


한쪽에서는 일주일짜리 문신인 헤나를 해주기도 한다. 원래는 60달러인데 반절만한 크기로 부탁을 하면 30달러에 해준다. 일주일간 나는 30달러 짜리 깃털을 어깨위에 달고 다녔다. 1층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Rustico’도 분위기가 훌륭하다. 근처 골목을 돌다보면 테이블이 두 세 개뿐인 개인카페들도 많다. 그 곳에는 하나같이 세련된 패션을 한 젊은이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센트럴 등을 중심으로 포화되어 있던 창업의 물결이 이제 지역이동을 하고 있다. 진짜 젊은이들은 더 이상, 관광지에 없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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