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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Sep 19. 2020

전 오늘도 애착 이불을 껴안고 잡니다

뜻밖에 이불 고백


<세상에 이런 일이>에 몇십 년째 한 이불과 사랑에 빠진 '이불 사랑' 여성의 사연이 방영된 적이 있다. 이불은 이미 닳고 닳아 이불의 형태보다는 두운 실뭉치 느낌이 났다. '저 정도로 좋아한다고?' 세상 처음 보는 이불의 속내에 놀랐지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내게도 '애착 이불'이 있다.

성인이 덮기엔 팔다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좁고 짧지만, 손으로 문대면 보드라운 실들이 한 올 한 올 느껴지는 분홍색 수건. 나는 그걸 '수건 이불'이라고 불렀다. 분명 수건이었지만 항상 내 침대 위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부터 수건 이불과 함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침대를 따로 쓰기 시작한 초등학생 때부터 존재를 식한 것만은 확실하다. 침대에 누워 양손에 꼬옥 움켜쥐고 있으면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세탁을 이유로 곁에 없밤이면 괜히 손이 심심해서 깊은 잠에 못 들 것 같았다. 그래도 어느샌가 눈 떠보면 아침이었지만.


내가 왜 이 이불을 좋아하게 됐는지 곰곰이 돌이켜봤다. 말로는 정확히 표현하지 못할 느낌이지만 최대한 짜내 본다면 메마른 손길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부드러움이 매력이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서늘함을,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포근함을 선사해주었다. 특수 소재로 만든 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어릴 때부터 쌓인 심리적 유대감도 무시할 수 없다. 피부와 닿고 있으면 안정감을 준다.


이젠 침대를 혼자 쓰는 게 가장 편해졌지만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는 게 무서웠던 때가 있었다. 특히 자기 전 무서운 영화를 봤거나 귀신 꿈을 꾼 날에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안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 아빠의 잠을 방해하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부모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엔 몸이 커졌다. 결국 수건 이불을 꼭 안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애틋함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까.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친구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애착 이불'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다. 즐겨보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불에 집착하는 아이가 나왔고 거기서 '애착 이불'을 알게 됐다. 애착 현상은 주로 인형이나 천을 대상으로 나타나는데 애정결핍과도 연관이 있다. 부족한 애정을 다른 사물과 애착을 형성해 채우려는 행위인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혹은 가졌던) 증상이기도 하다. 다행히 내 경우는 심각하지 않았으나 애정결핍일 수도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난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스킨십 욕구를 충분히 채우지 못한다. 다가가면 멀어지더라. 전에는 내가 막내라서 애정 표현이 많은 건가 했는데 우리 가족이 적은 거였다. 나를 빼고는 스킨십에 별 관심이 없다. 좋아하지 않는 쪽에 가깝다. 이불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그때부터 애정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애정을 쏟아부을 대상이 없어서, 받아야 할 애정이 부족해서 지금도 껴안고 자는 거냐고 물어본다면 부정 못하겠다. 애정결핍이라는 단어가 조금 과한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애정 충만도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어쩌면 너무 익숙해져 습관이 돼버린 행위일 수도 있겠다. 손에 없다고 불안해지지는 않으니 이 정도면 곁에 둬도 괜찮지 않을까 합리화를 해본다.

난 오늘도 내 이불을 껴안고 잘 거니까.




*사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이불은 2호다. 오랜 시절을 함께했던 1호는 이미 내 곁을 떠나고 없다. 2호가 오기까지 공백기가 꽤 있었고 애착 이불 없는 삶에 적응하는 듯했으나, 불현듯 찾아온 2호 덕에 편안한 잠을 보장받고 있다. 1호가 부드럽고 온순했다면 2호는 보다 거칠지만 길들일수록 차분해진다.  쓰고 보니 무슨 애완동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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