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몰라서 행복했던 그 때
우리 반 친구들은 몇 살에 결혼하고 싶니?
선생님의 물음에 5학년 3반 교실이 어수선해졌다.
왜 갑자기 저런 질문을 던지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따라 선생님은 집요하게 모든 학생의 대답을 이끌어냈다. 그 나이 때 애들이 그렇듯이 답은 제각각이었다.
"음.. 스물여섯 살이요."
"전 스물아홉 살!"
"그거 꼭 해야 돼요?"
등등
무수한 대답의 파도타기 끝에 내 순서가 왔다. 별거 아닌 질문인데도 뭐가 그리도 쑥스러웠는지 머뭇머뭇 말했다.
"스물세 살이요.."
이어서 건너편에 앉아있던 여자 아이의 순서.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민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스물셋이요."
자꾸만 옆으로 길어지는 입꼬리를 난 숨길 수 없었다.
민주를 처음 알게 된 건 2학년 때였다.
수업 시간엔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며 놀았던 친구. 민주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또래답지 않게 남자 애들한테 살갑게 대했다는 점이다. 대게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노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민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더 편했다.
무슨 우연인지는 몰라도 우린 5학년 때까지 쭉 같은 반이었다. 같은 선생님과 교실을 거치며 익숙하고 편해졌지만 막역한 사이까지는 아니었다. 성별이 달라서 생긴 거리감이 그땐 왜 그렇게 컸는지..
여름방학을 앞두고 민주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 앞까지 따라와선 '나 너 좋아해!!!'라는 돌직구를 던지고 도망갔다.
뭐라 대답할 새 없이 가버려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난 민주가 아닌 내 짝을 좋아하고 있던 터라..
그래도 기뻤다.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민주는 전부터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가 되면 정성스레 포장한 선물을 주곤 했다.(정작 난 받기만 하고 잘 챙겨주진 못했다.) 알게 모르게 꾸준히 호감을 표시해왔던 민주였다.
날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고백 이후 우리는 꽤 친해졌고 하굣길에 동행하거나 집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짝을 향한 마음이 남아있어서 민주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꾸 신경 쓰이고 생각나면 좋아지는 걸까.
민주와 가까워지긴 했지만 좋아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 날 선생님의 결혼 질문에 민주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민주의 대답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원하는 숫자가 나왔을 때 안도하면서. 이미 민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무런 고민도, 현실에 대한 자각도 없는 순수한 대답. 결혼은 '스물셋'에 하고 싶다는 말이 민주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난 이미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왜 그때 민주가 나와 같은 나이에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직접 물어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런 사소한 기억 따위는 이미 하얗게 잊어버렸을 것 같고, 나와는 관계없이 처음부터 스물셋에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나만 나랑 결혼하려고 그렇게 말했구나 하는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있었을지도.
민주에게 좋아한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나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며칠 뒤 자리를 바꾸는 날이었다. 나는 교실 맨 뒷자리, 민주는 맨 앞자리에 배정됐다. 뽑기로 결정된 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뇌를 지배하려던 순간, 선생님이 기회를 줬다.
"칠판이 안 보여서 자리를 꼭 바꿔야겠다는 사람?"
시력이 안 좋긴 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근데 바꿔주는 자리가 민주 옆자리였다.
"저.. 저요."
그렇게 우린 짝꿍이 됐다.
교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인사하고 밥 먹고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옆에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민주와 짝이 되고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사귀는 사이가 되었던 것도 아니다.(사귄다는 개념을 알기 전이었다.)
날 좋아해 주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미처 감상하기도 전에 휘리릭 지나가는 슬라이드 같다.
기억을 헤집어 봐도 몇 장의 스냅 컷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민주와의 짝을 마지막으로 5학년 과정은 끝났고 새로운 반 배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4년 동안 같은 반을 했던 민주였기에 이번에도 우연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우리는 같은 반을 할 운명이고 인연인 걸까?
우연은 의식하는 순간 그 힘을 잃는다.
그래서 우연인 것이다.
민주와 같은 반이 되기를 처음으로 바랬건 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6반, 민주는 9반.
거꾸로 뒤집으면 같은 숫잔데 잘못 써진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린 반 배정이 써진 통지표를 사이에 두고 태연한 척 인사를 나눴다.
"잘 가.."
"응.. 너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다른 반이 되니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민주가 있던 9반은 겨우 다리 하나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외딴섬 같은 반이었다. 나도 새로운 반에 적응하기에 바빠서 민주라는 존재를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민주는 생일이나 기념일에 수줍은 미소를 띠고 찾아와 선물을 건네줬다.
다리를 건너갈 용기가 부족했던 난 그저 받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학년은 그렇게 끝났다.
민주를 다시 만난 건 12년 뒤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