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요즘 어떻게 지낸대?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 물론이고(이 점은 민주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없는 학교 생활을 보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멀어져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 정말 한 번도 못 봤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아니오'. 보긴 봤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나 쉬는 시간에 복도를 지나다 특유의 낭랑한 웃음소리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민주는 내게 옆모습을 딱 한 번 보여줬다. 그날 처음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반가운 마음에 직접 반 앞을 찾아가.. 진 않았고, 당시 유행하던 싸이 일촌을 신청했다.
네트워크 상에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만날 일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만큼 우린 서로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랜만이라서 반가운 초등학교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2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딱 그 정도의 관계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는 여전히 내 소중한 추억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중학교 동창의 입에서 민주의 이름을 들었을 때 깨달았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남겼다.
안녕! 나 기억해?
싸이 일촌을 맺듯 서로의 인스타 팔로워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초연결사회의 장점이랄까. 누군가의 행복한 일상들로 가득한 인스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현실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 앱 이용에 거리를 뒀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북스타그램에 꽂혀 간단한 책 리뷰를 올렸는데 마침 민주의 게시글과 성격이 비슷했다. 몇 번의 좋아요가 오고 가니 용기가 생겼다.
"안녕! 나 기억해?"
"ㅋㅋㅋㅋㅋ당연하지!"
"얼마 전에 강인이 만났는데 동창회에서 너 봤다고 해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ㅎㅎ"
우린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연락처를 교환했고, 카톡으로 넘어갔다.
분명 처음에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는데, 한 번 말문이 트이니 댐 안에 가둬놓았던 물이 뿜어져 나오듯 폭발적이고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초저녁부터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그동안 묵혀놓았던 수많은 시간 중 '일부'를 공유했다. 마치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바탕 떠들고 온 것 같았다.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버디버디'에서 '카카오톡'으로 메신저가 바뀌었다는 점만 빼면 이전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민주의 직장은 우리 학교 근처였다. 덕분에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인사치레로 끝나지 않게 됐다. 몇 주 뒤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고, 스물셋에 결혼한다던 꼬마와 만났다. 가을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차가운 입김을 머금은 겨울이 오고 있었다.
휴학 중이라 학교 갈 일은 없었지만, 공모전 핑계를 대고 나왔다.(이후 공모전 작품 완성에 민주의 도움을 받았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몇 년을 다녔던 익숙한 횡단보도 건너편에 민주가 있었다. 오랜만이었음에도 한눈에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얼굴은 그대론데 몸만 커져버린 느낌이 이런 거였구나. '짜식 잘 컸네.' 민주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평소 자주 들렸던 파스타 집에 갔다. 살짝 늦은 저녁이라 가게 안은 한산 했다. 조용해서 좋았다. 이것저것 물어볼 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밀려오는 배고픔도 참을 수 없었다. 우린 쉴 새 없이 음식을 흡입했고, 본능에 집중했다. 그래, 원래 식당에선 식사가 메인이니까.
근처 카페에서 아까 못한 얘기를 마저 나눴다. 민주는 근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전에도 한 번 들은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초등학교 이후 서로에 관해 얘기한 건 처음인데. '학급 문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우리에겐 4학년과 5학년 때 만든 학급 문고가 있었다. 거기에 민주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썼었다. 초등학생 때 꿈을 실현시키다니 이 아이 대견하잖아.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내 꿈은 뭐였을까? 꿈을 쓰긴 한 건가?)
분명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다양한 정보가 오간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편한 친구와 만나면 늘 그렇더라. 실없는 소리만 주고받아도 힐링되고 행복해진다. 12년 만에 만난 민주와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한 건 기우였다. 그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다만 이 날은 유독 민주가 피곤해 보였다. 하루 종일 일하고 왔으니 힘들 수밖에.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다음을 기약했다.
집으로 돌아와 '문제의 학급 문고'를 찾기 위해 온 방을 뒤졌다. 책장 아래쪽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문고 두 권을 발견했다.
우린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