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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Aug 23. 2020

불규칙 바운드

2018년의 틈

텅 빈 운동장에 부는 바람이 인기척을 기다린다.


학교에 입학한 지 6년이 지났지만 운동장은 여전히 낯설다. 그저 학교 시설에 불과했던 운동장이 놀이터가 되고 훈련장이 된 건 올해 3월부터였다.

고학번에 나이도 꽉 찬 신입이 들어왔음에도 앳된 동아리 선배들은 날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대학생활 내내 원했던 낭만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야구에 이런 말이 있다. ‘수비가 좋은 팀이 진정한 강팀이다.’ 누구나 이 말을 가슴속에 새긴 듯, 캐치볼로 시작해 몸을 푼 뒤 자연스럽게 펑고(수비 연습을 위해 타자가 배트로 공을 쳐주는 것) 훈련이 이어졌다. 타구를 직접 받아보는 게 처음이라 떨렸다.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에 글러브를 대서 멋지게 잡는다. 머릿속으로 완벽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고 공은 내 가랑이 사이를 완벽하게 빠져나갔다. 정신을 집중해 봤지만 두 번, 세 번 연속해서 공을 뒤로 보내버리고 나니 김이 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능숙한 솜씨로 공을 잡아내던 선배가 넌지시 말했다. 공을 잡으려면 몸을 최대한 낮추라고. 공이 빠져나갈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몸을 숙이니까 신기하게도 공이 글러브 안으로 쏙 들어왔다.

감격스러운 첫 성공에 손이 얼얼했다. 상하체가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공이 다리 사이로 나를 농락하는 광경은 점차 드물어졌다. 방법을 알고 나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치고 상당히 감각이 있다는 칭찬을 듣고 우쭐해졌던 찰나, 여느 때와 같이 공은 바닥을 통통 튀면서 내게로 왔다. 한껏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잡으려는데 웬걸 갑자기 오른쪽 어깨너머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불규칙 바운드였다. 불규칙 바운드란 공이 지면에 닿았다가 불규칙하게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튀는 것을 말한다. 프로 경기에서도 간혹 나오지만 지면이 평탄하지 않은 학교 운동장에서 더 흔하게 발생하곤 한다.


공을 놓치면 ‘그것도 못 잡느냐’는 식으로 장난치던 야구부 선배들도 일순간 조용해졌다. 누구도 실력을 비난하지 않았다. 선배가 웃으며 한 번 더 공을 쳐주었다. 그 웃음이 멋졌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개입했을 때 결과가 좋지 못했다고 나무라지 않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 지나간 일에 위축되지 않고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자세.

조금만 틈이 보이면 물어뜯고 깎아내리기 바쁜 세상에서, 조그만 관대함은 생각보다 큰 위안과 용기를 전달한다. 어둠 속에서 등대의 빛이 더 먼바다를 밝히듯이.

그렇게 야구의 매력에 빠졌다.




금요일 오후, 연습이 끝나고 운동장을 벗어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시험 준비라는 명목으로 당당하게 휴학을 신청했다. 쉬운 수험생활이 어디 있겠느냐 만 반복되는 불행한 삶을 견디기 힘들어 뛰쳐나온 지 3개월이 지났다.

지금은 휴학이라는 잔잔한 바다에 빠져 목적 잃은 항해를 하고 있는 상태. 주변에서는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을 때 쉬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 걱정 없이 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손때보다 먼지가 익숙해진 토익 책을 꺼내 들고 쓱쓱 먼지를 털어본다. 이거라도 안 보면 뒤처질 거 같아서.


바람 부는 대로 물살이 이끄는 대로 하루를 표류하다 보면 나 자신이 바둑판 위의 점처럼 작아 보일 때가 있다. 몸을 움직일 때가 됐다는 신호다. 노트북을 켜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살펴본다.

채용연계, 계약직, 파견직 등 일일이 다 찾아보기 힘들 양의 구인 공고가 화면을 뒤덮는다. 휴학생의 신분으로 아무 준비 없이, 구인 시장에서 찾을 수 있는 종착지는 ‘단기 아르바이트’다.


그러나 ‘단기 아르바이트’조차 경쟁이 치열하다. 단기 근무임에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요한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가슴이 턱 하고 막힐 때가 종종 있다.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과 채워지지 않는 빈칸은 내 빈틈을 여실히 까발린다.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기 때문에.

하지만 당장 메꿀 수 없는 이 보일수록, 그 틈을 후벼 파는 질문이 계속될수록 뼈아프다. 힘이 빠진다. 야구공을 뒤로 여러 번 빠트리고 나면 위축되는 것처럼.


서류통과 후 만나는 면접관의 질문도 날 당황하게 만든다. “네오 씨의 하루 일과를 말해주세요.”라는 식의 별거 아닌 물음에도 면접관이 원하는 답은 있기 마련. 예상 못한 질문에 일과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삼분할 해서 말하자 그는 나를 게으른 사람으로 규정하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큰 문제없이 면접을 마쳤지만 합격여부 문자는 받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돌이켜보면 잊을 때마다 한 번씩 불규칙 바운드와 맞닥뜨리곤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했는데, 예상과 달리 결과가 마땅찮을 때. 생각할수록 분하고 아쉽다. 분명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눈에 밟힌다. 결국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아 자책했다.


야구에서는 불규칙 바운드로 타자가 살아 나갈 경우 수비수의 실책이 아닌 타자의 안타로 기록한다. 내가 못해서가 아니라 타자가 운 좋게 잘 쳤기 때문에 속상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된다.


현실은 불규칙 바운드에 냉혹하다. 내가 메우지 못한 또 하나의 일 뿐이다. 그래서 위축되곤 한다. 하지만 글러브를 지면에 대고 아무리 상체를 구부린다 해도 모든 공을 잡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땐 씩 하고 웃어넘겨 본다. 이 웃음과 여유가 남은 경기의 향방을 바꾸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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