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산에 지고, 속도에 밀렸다
에필로그
소개팅은 결국 ‘인간의 가치 탐구’였다.
나는 그렇게 말해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만남이라 여겼지만,사람의 말투, 태도, 삶의 궤도를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레 질문이 생겼다. 이 사람은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비슷하고, 어디에서 다를까. 그리고 그 다름은 과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더 큰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이 사람과 내가 함께 만든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한 사람과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은 꽤나 철학적이며, 동시에 낭만적이었다. 나는 그 상상 속에서 사랑을 꿈꾸었고, 때로는 그 상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또 다른 가능성을 그리며 다음 질문으로 나아갔다.
1장. 소개팅은 언제부턴가 일이 되었다
처음 소개팅을 시작했을 땐, 정말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취향이 맞고, 웃음코드가 비슷하고, 눈빛을 마주칠 때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소개팅은 더 이상 설렘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일정처럼 수행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나가 누군가를 마주하고, 적당한 대화를 나눈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서는 것. 감정은 늘 그 뒤에 따라오지 않았고, 나의 마음은 점점 늦게 반응하거나, 아예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ENTJ다. 판단은 빠르지만, 마음은 그만큼 단순하지 않다. 가능성을 단번에 버리지 못하는 편이라, 첫인상이 애매해도 한 번쯤 더 만나보고, 말이 잘 안 통해도 한 번쯤 더 말해보자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기대라기보다는, 습관처럼 굳어진 나의 방식이다.
그날도 비슷한 흐름이었다. 합정역 근처, 간판 없는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조명이 따뜻했고, 사케 메뉴는 손글씨로 적혀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상하게 그런 자리에서는 질문을 꺼내기 쉬워진다.
“요즘 연애에서 가장 두려운 게 뭐예요?”
“다툼이 생기면 피하세요, 말하세요?” 같은 질문들.
나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하는지보다, 그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말보다 반응에 더 많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살폈다. 사람은 말보다 웃음에서 훨씬 많은 걸 흘린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요즘엔 조금 과하게 들린다. 감정보다 분석이 먼저 오는 시대, 사랑을 말하면 사람들이 당황한다. 내가 유난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말을 아끼게 되고, 결국은 감정 자체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
사랑은 실패해서 무거워진 게 아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그 감정을 나누려는 마음이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에 무거워진 거다.
그날의 대화는 무난했고, 그의 말은 정중했으며, 내가 웃는 타이밍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대답에서 힘이 빠지는 걸, 나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아무 말도 오래 가져가지 않았다. 김훈의 문장처럼 말하자면, 그건 이미 끝난 문장이었다.
집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합정역 사거리를 지나며 빨간불에 잠깐 멈췄고, 오늘의 대화를 복기했다. 그가 했던 말과 그가 고른 단어, 내가 웃었던 타이밍까지. 모두 틀린 건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집에 오는 길에 가장 크게 들리는 건, 내 걸음소리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잘 들어가셨어요?” 짧은 메시지였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고 답장을 보냈다.
혹시 이 감정도, 너무 익숙해져서 내가 놓친 건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접었다. 나는 아직 사랑을 믿는다. 아무리 실망해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온 하루를 바꿔놓는 순간을 나는 몇 번이나 봤다. 그게 지금 시대에 낯부끄러운 낭만일지라도 말이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는 태도, 감정을 쉽게 정리하지 않는 마음. 그 둘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한, 나는 다음에도 이 거리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웃고, 혼자 돌아서며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