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의 직감을 떠나 용기를 낸 시작도 있었다.
많이 달랐던 사람이었다. 말투도 다르고, 리듬도 다르고, 감정 표현 방식도 달랐다. 나는 두 번의 소개팅 이후 그를 정리하려고 했다. 이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용히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시 마주쳤다.
회식이 끝난 퇴근길, 지하철 플랫폼에서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는 5분 전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던 중이었다.
서로 통화를 하며 양쪽 끝에서 걸어오던 우리는 결국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장면은 잠깐이었지만, 정말 영화 같았다.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나와 술을 한 잔 더 했다.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장난처럼 오갔고, 그 순간만큼은 그 말이 그냥 웃자고 꺼낸 건 아니었으면 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예상과 달리 편안했다. 그는 나와 참 많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 다름이 나에게는 안정감을 줬다.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속도를 맞췄고, 감정은 서서히 자라났다. 조심스럽게 시작된 관계는 어느 순간 익숙해졌고, 나는 조용히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고, 나는 그의 곁에 있으려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점 말이 줄었다. 만나도 침묵이 많아졌고, 그 침묵은 조심스럽게 우리 사이를 채워나갔다. 나는 그가 괜찮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만으로는 어떤 현실도 이겨낼 수 없다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어도 상대가 그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의 고통을 이해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 그의 편이 되고 싶었지만, 그를 지탱하기엔 나 혼자의 감정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조용히 물러났고 나는 붙잡지 않았다. 그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무게가 만든 거리였다.
이별 이후 며칠 동안, 나는 조용했다. 마음이 무너졌다기보다는, 바깥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초탈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실감 났다. 감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 감정 위에 내가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기력했지만, 분명한 자각이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감정으로는 이 현실을 함께 감당할 만큼 단단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도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갈 수 없었다. 그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서로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우리를 시작하게 했지만, 현실은 조용히 그것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관계는 끝났고, 나는 여전히 그를 나쁜 사람이라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통해 나는 어떤 관계든, 감정을 넘어서는 '감당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기술은 나도, 그도 익히지 못한 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 막 깊어지기 전에 이런 일들을 마주한 것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더 큰 무너짐 없이, 이 정도의 아픔으로 관계를 놓을 수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이별은 슬펐지만, 잔인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