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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Dec 09. 2021

사무관의 손

내 손으로 쓴 글의 무게

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청문회 전날에 부서 직원들은 모두 대기를 합니다. 장관 후보자께 할 질의를 사전에 입수하게 되면 그에 대한 답변자료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죠. 저희는 이를 '국회 대기'라고 부르는데 늦을 땐 새벽까지 계속됩니다.


그때는 처음 하는 국회 대기였습니다. 제 업무와 관련된 질의가 없기를 바라며 대기했는데, 하나 나왔습니다. 저는 전임자들의 과거 자료를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장관 후보자의 답변을 작성했습니다. 그걸 당당하게 과장님께 보고 드렸다가 또 한마디 들었습니다. 과장님께서는 특히 적극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부분을 지적하시면서, 저에게 진짜 검토할 계획이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장 검토할 계획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왜 그렇게 적었나?"

"과거 답변을 참고하다 보니 그렇게 적었게 되었습니다."


저 대답은 최악의 답변입니다. 공무원이 하는 일 특성상 주기마다 반복되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과거를 답습했다고 하는 건 지금도 최악의 답변이고, 과장님 앞에서도 최악의 답변이었습니다. 과장님께서는 (아마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시며) 저를 타이르듯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무관, 장관 후보자께서 우리 업무에 대해 무엇을 아시겠나. 우리가 적어드리는 답변자료를 참고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고. 자네가 적은 걸 장관님이 국회, 국민을 상대로 읽으신다고 생각해봐. 그렇게 쉽게 작성할 수 있겠어? 정말 깊이 고민해서 우리 부처가 할 수 있고 꼭 해야 하는 것을 적어야 하는 거야."


일하다 보면 가끔씩 사무관이 생각보다 영향력도 없고 위에서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기만 하는 것 아니냐며 자조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 과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제 역할을 되새깁니다. 제 손으로 쓰는 글의 무게를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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