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12월 31일에 연가를 신청했습니다. 과장님께서 그날 연가를 쓰신다길래 저도 30대 마지막 날이니만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겠다며 연가를 쓴다고 했습니다. 그 해는 정말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일도 바빴고 과장님도 어려웠으며 여자친구랑 헤어졌었거든요. 저는 연말까지 별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12월 중순 어느 날 저녁 기습적으로 청사에 찾아온 민원인 10여 명이 장관님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과장님은 전혀 예상도 못하신 채 장관실에 불려 가셨고, 저와 주무관님은 저녁도 못 먹고 과장님을 기다렸습니다. 밤늦게 나오신 과장님은 저희에게 장관님 지시사항이라며 12월 말까지 민원인들이 한 요청이 타당한지 검토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주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12월 31일 오후에 장관님 보고가 잡혔습니다. 연가인 날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장관님이 가능한 날짜가 없었습니다. 결국 과장님과 저는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관님 보고 직전까지 자료를 다듬고 준비를 했습니다. 한참 후 과장님께서 보고를 잘 마치셨는지 사무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무관, 다 끝났다. 이제 퇴근하자. 술 한잔 하러 가야지."
"과장님, 지금 오후 3시인데요?"
"어차피 오늘 우리 둘 다 연가잖아. 바로 퇴근해도 돼!"
이렇게 과장님과 저는 대낮부터 파전에 소주를 시작했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과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저도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집에 오자마자 바로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 소리에 깨서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동기들이 저보고 불혹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부르는 전화였습니다. 일어나기 귀찮아서 안 간다고 말할까 했는데, 순간 오늘이 30대 마지막 날이란 게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보낼 순 없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친구 집에 가서 마지막 30대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일이 잘 풀리기를 기대하며 40대를 맞이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