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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Mar 08. 2022

최악의 주말

금요일 오후 5시 반이었습니다. 저녁에 오랜만에 친구랑 술 약속이 있었죠. 일 대충 마무리 짓고 퇴근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무실로 전화가 오더군요. 월요일에 서울에서 여러 부처가 참석하는 중요한 회의가 생겼다고요. 우리 부처도 국장님 두 분이 참석하시기로 했는데 그중 한 분이 우리 국장님이셨습니다. 국장님께서 저보고 회의 준비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하신 전화였습니다.


저는 멘붕에 빠졌습니다. 사실은 그 자리에 온 지 며칠 안 지났기 때문에 업무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거든요. 전임자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회의에 참석하는 부처들에게 자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금요일 오후여서 전화도 안 됐습니다. 과장님께서는 서울에 저녁 선약이 있다며 퇴근하셨고요. 그러면서 저보고 초안을 만들어서 보내면 검토해서 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친구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취소했습니다. 그 친구도 이런 일을 종종 겪어서 그런지 쿨하게 이해해줬죠. 저는 일단 공부부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보니 구글에서 검색해서 닥치는 대로 연구 보고서와 논문을 모았습니다. 수십 편의 자료를 뽑아 읽고 정리했습니다. 일단 개발새발이라도 써놓고 과장님께 보내야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으니깐요. 어떻게든 한 장 써서 보냈더니 과장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이 사무관, 그렇게 접근하면 안 돼. 우리 부처의 입장이 어떤지를 적어야 하는 거야. 그러려면 검토 배경부터 시작해서 검토 후 우리는 수용이다 불수용이다, 수용이면 어떤 걸 조건으로 수용이다, 불수용이면 뭐 때문에 안된다 이런 것들이 보고서에 나타나도록 해야 해."


말은 쉬웠지만, 내용도 모르는데 심도 있게 검토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금요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는데 토요일에는 또 친한 친구 결혼식이 서울에 있었습니다. 세종에서 전세 버스를 타고 갈 때 추리닝도 함께 챙겼습니다. 결혼식 마치고 집에서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거든요. 그렇게 토요일도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일요일에는 과장님도 출근하셔서 밤까지 계속 수정하고 고쳤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했던 탓인지 보고서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결국 시간이 부족해서 완벽하게 검토하지 못한 채 국장님께 보고를 드렸고, 국장님께서는 이대로 자기가 회의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국장님만 참석하시기로 하고, 우리의 의견은 '불수용' 이렇게만 전달했습니다.


노력한 대비 성과는 전혀 없었던 최악의 주말이었습니다. 자리에 온 지 얼마 안 된 건 변명거리가 안 되었습니다.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소에 업무 파악을 잘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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