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원에서 법제 발표가 있었습니다. 분임별로 법령 개정 연습을 해서 전체 교육생과 법제 교수님(법제처에서 파견 오신 과장님)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분임에서는 법무행정 직렬인 동생이 팀장으로서 준비했죠. 그런데 갑자기 저에게 발표를 좀 대신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한다고 했죠.
도시재생과 관련된 법령을 개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이 어렵더라고요. 괜히 내가 한다고 했나 싶었지만 이왕 하기로 한 것 열심히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분임에 민간경력채용(민경채)으로 들어온 형, 누나 앞에서 리허설을 하고 교정도 받았습니다. 나중에 분임 누나가 팁을 하나 주셨는데, 교수님의 질문을 대답하다가 잘 모르겠으면 제가 법 전공이 아니란 걸 최대한 어필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분임 발표 순서가 왔습니다. 저는 준비한 대로 발표를 무사히 끝냈고, 교수님께서 발표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모르겠어서 잘 모르겠다고 답을 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몇 번 더 하셨지만 역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분임에선 대답이 척척 나온 것과 너무 비교되어 보였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습니다.
"교수님, 제가 공대 출신에 재경직이다 보니 법은 행정법을 공부한 게 전부입니다. 그래서 대답이 부실한 부분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웃으시면서 물으셨습니다.
"다른 분임은 변호사나 법무행정직이 발표했는데, 왜 그 분임은 재경직이 발표를 하지? 자네가 막내라고 분임에서 발표를 시킨 건가?"
그 순간 교육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어려 보인다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분임에서 민경채를 제외하고 제일 연장자였거든요. 저는 교수님께 어리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린 후 발표를 급히 마무리했습니다. 발표석에서 내려와서 카톡을 확인해 보니 절 놀리는 내용의 메시지 수백 개가 와 있더군요.
어쨌든 그 발표가 인연이 되어서 교수님과 연수원 내내 인사드리며 지냈고, 연수원을 마치고 부처로 발령받고서도 몇 번 더 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도움을 받으며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