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범생이(모범생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소리를 듣다 보면 친구들과 멀어질 것만 같아서 그랬나 봅니다. 그래도 머리가 좋단 소리는 듣고 싶어서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영화나 만화 주인공처럼 공부하는 건 싫고 노는 건 좋은데 또 머리가 비상하다 보니 시험을 보면 성적은 잘 나오는 그런 캐릭터가 되고 싶었던 거죠.
놀면서 공부까지 잘한다는 이미지는 중학교까지는 어느 정도 통했는데 특목고에 진학하면서 다 깨졌습니다. 첫 모의고사 성적이 전교 '뒤에서' 5등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전교 1등 하던 애들을 모아서 다시 순서를 매겼으니 그럴 수 있다는 위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그런 동정을 받기 싫어서 다음번에는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해봤지만 중간 정도 성적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만 공부에 손을 놔버렸습니다. 앞으로 내가 속한 집단에서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으니, 그럴 거면 차라리 맘 편하게 놀아야겠다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제 자존심도 다 버렸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닐 동안에는 적당히 공부하는 척만 했고, 그래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저의 가짜 실력은 대학원을 다니면서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공부한 적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대학원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교수님과 하는 연구에서도 항상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 죄송스러웠고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해도 통했는데, 이젠 제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것을 깨달았죠. 결국 박사 과정에 진학해서 교수가 되는 꿈은 포기하였고, 석사를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병역 특례로 중소기업에서 3년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민 끝에 행정고시를 보겠다고 했을 때도 주변에선 말렸습니다. 너 공부하는 거 싫어하잖아, 행시는 꾸준함이 중요하다던데 버틸 수 있겠어? 친구들의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렇게 도박하는 게 맞나 싶었죠. 그래도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이룬 것은 없었고,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늦었고, 제가 기댈 것은 고시 이것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그동안 대충 살아온 것과 다르게 제대로 공부를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결과적으로 제가 붙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고시 공부하는 4년이 너무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지식이 쌓인다는 기쁨을 십수 년 만에 느꼈죠. 옆에 같이 공부하던 동생은 시험에 나올만한 것을 중심으로 공부해야지 형처럼 깊게 공부하면 장수한다고 핀잔을 줬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모 교수님의 판례집을 혼자 사서 본 것은 여태 놀림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남 눈치 본다고 마음 편하게 공부한 적도 없었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실컷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습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지금 저는 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너무 회사에 가고 싶어서 저절로 눈이 일찍 떠진 적도 많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회사 사람들이 워커홀릭이라고 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들 눈치 본다고 제 진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던 저는 지금 공무원으로 일하는 게 너무 행복하고 즐겁다고 말합니다. 제 자신이 이런 사람이란 걸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더 이상 아닌 척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네요. 남은 인생도 범생이처럼 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