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과장님, 선배 사무관 이렇게 셋이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과장님께서 어쩐 일인지 자기에게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과장님 말씀을 잘 따르시던 선배 사무관이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과장님께서는 이 일을 회상하시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를 인용하셨을 정도로 충격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선배는 과장님께서 선배가 쓰던 보고서가 마음에 안 들면 그 파일을 달라고 한 후 본인이 직접 컴퓨터로 고치신 일이 몇 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배는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바쁘다고 하더라도 사무관에게 보고서 작성을 맡겼으면 사무관이 끝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과장님의 행동은 사무관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장님께서는 그 이야기에 놀라며 바로 해명을 하셨습니다. 일이 워낙 많으니 보고서를 수정한다고 사무관이 왔다 갔다 하느니 자기가 한 번에 수정해서 주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냐라고 하셨죠. 하지만 선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과장님의 행동으로 자기가 신뢰받지 못한다고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함께 일을 할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선배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 일은 자기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 또한 선배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과장님께서 제 보고서를 직접 고쳐주신다고 하면 내심 더 좋아했습니다. 일단 일이 빨리 끝나니깐요. 하지만 선배 덕분에 제가 사무관으로서 책임감이 부족했었단 걸 깨달았습니다. 제 일을 제가 못 끝내서 남이 대신한다면 저의 자존심에 상처가 난다는 것도요.
최근에 어떤 과장님께서 자기 부서 직원들은 책임감이 없다며, MZ세대과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그 과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무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장님이 일을 시켰다가 마음에 안 들면 과장님이 알아서 다 고친다고 하더군요. 어차피 과장님이 고칠 건데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과장님께서 사무관에게 일을 맡겼으면 일처리가 답답하더라도 그 사무관이 직접 끝내도록 하면서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간에 과장님이 채어가서 직접 마무리한다면 그 당시의 일은 빨리 잘 해결되겠지만, 이게 반복되면 사무관 입장에선 일할 맛이 안 나겠죠. 나중에는 과장님께서 모든 일을 직접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리더라면 조직의 단기적인 성과에만 치중해선 안 되고 구성원을 성장시켜서 지속 가능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직원들이 결자해지 할 수 있도록 참고 기다리는 것도 리더의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