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국장님이나 과장님께 보고를 드리게 되면 그 보고에 대한 피드백을 받게 됩니다. 그중에는 피드백을 받으면서 정말 본받고 싶을 정도로 대단한 경우도 있었고, 차라리 안 받는 게 나을 것 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1
보고서를 최고로 잘 쓰신다고 평가받던 과장님의 경우입니다. 제가 보고서를 작성해서 가져가면 과장님께서 그 보고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십니다. 아무 말씀도 없이 보시다가 빨간 펜으로 슥슥 수정해서 주십니다. 그게 끝입니다. 가끔 제가 엉망진창으로 보고서를 썼을 경우에는 보고서를 덮으시고 저에게 물으십니다. 어떤 의도로 쓴 거냐고. 그러고 나서 보고서를 슥슥 수정해서 주십니다. 신기한 점은 그렇게 수정하신 것을 반영하면 글자 수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딱 한두 줄에 맞춰집니다. 머릿속으로 적절한 단어를 사용해서 쉽게 표현하면서도 글자 수까지 계산하시나 보더라고요. 저는 그 정도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2
보통 과장님들은 보고서를 보시면서 이렇게도 고쳤다가 저렇게도 고쳤다가 하면서 저에게 주십니다. 그럴 때면 제가 잘 썼으면 과장님께서 그 고생을 안 하셨을 텐데 하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과장님의 입장에선 처음부터 새로 쓰는 게 훨씬 편하시겠지만 그래도 제가 쓴 보고서의 틀을 유지하시려고 그렇게 고생하며 수정하시는 것이니깐요. 지적하신 걸 보고서에 반영해서 드리면 또 수정할 부분이 나옵니다. 그렇게 과장님께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서의 완성도가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3
국장급 이상의 간부들께 보고를 하면서 저희들이 간부에게 기대하는 바는 보고서의 전체 방향이 맞느냐를 봐주시는 것입니다. 보고서를 세세하게 고치는 것은 과장님까지 하실 일이라 생각하죠. 간부들은 보고서를 보시고 전체 틀을 고치시던가, 어떤 내용을 추가 또는 삭제해라는 지시를 하시지, 특정 문장이나 단어를 고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딱 한 분 빼고요. 그 국장님은 과장님보다 더 자세하게 문장을 뜯어보시고 표현을 수정하셨습니다. 심지어 조사(은는이가)까지도 따져가며 고치셨죠. 보고를 마치고 나면 보고서의 문장력이 더 좋아졌는지는 둘째 치고, 이 방향으로 실장님께 보고 드려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섰습니다.
#4
제일 별로였던 사례는 보고서를 딱 보자마자 바로 첫 줄부터 고치기 시작하는 경우였습니다. 전체를 한번 쭉 읽지도 않고 고치다 보니 분명히 뒤에서 쓴 내용인데 못 보고 앞에다 쓰라고 하고, 뒤까지 읽고 나서는 앞에 내용을 썼으니 뒤에 나오는 건 지우라고 하시고, 처음 짠 구조가 완전히 헝클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지시하신 걸 안 따를 수도 없었죠. 그분과 보고서를 고칠 때마다 점점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기안한 보고서라도 그분을 거치게 되면 보고서에서 제 이름을 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