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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Mar 31. 2022

숙직 중에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숙직 좀 안 섰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과장님은 과장되고 제일 좋은 점으로 숙직 안 서도 되는 것을 꼽더군요. 예전에는 모르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숙직인가 싶습니다. 곳곳에 CCTV도 있고, 밤새 경비 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사무실 보안도 잘 되어 있어서 굳이 우리 같은 공무원이 밤늦게 순찰을 돌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정작 순찰을 돌다가 이상한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피해자가 1명 더 추가될 것 같은데 말이죠.


숙직하면서 제일 싫은 건 숙직실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밤 11시에, 그리고 새벽 6시에 사무실 순찰을 돌아야 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래도 잠은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싶은데 원칙상 그럴 수가 없습니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대충 씻고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숙직실 침대에 누워서 자야 하죠. 저는 원래부터 집 아니면 잘 못 자는 성격이라 숙직을 설 때마다 새벽 1~2시까지 뒤척입니다. 혼자라 무섭기도 하고요.


말이 나온 김에 이 이야기는 꼭 해야겠습니다. 숙직 경험이 많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혼자 밤에 사무실을 돌고 난 후 씻고 숙직실 침대에 누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순찰을 돌려면 어떻게든 빨리 잠이 들었어야 했죠. 눈을 감고 뒤척거리며 자려고 애쓰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 중에 문 밖에서 여자목소리가 들린 것 아닙니까. 오금이 저려왔습니다. 잠결에 잘못 들은 건가 하고 귀를 쫑긋 세워봤는데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순간 한숨이 나왔습니다. 밖에 나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이대로 자는 척하고 싶었습니다. 꿈이었겠지 하면서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숙직 당번인데 그럴 수 없다 싶어 억지로 몸을 일으켰습니다. 내심 별일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살짝 열었습니다. 그러자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퇴근할 때 문단속 잘하라며 사무실 불 끈다는 공지 방송 소리였던 것입니다. 솔직히 그때 무심결에 쌍욕이 나왔습니다.


나중에 밤늦게 야근하면서 다시 그 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방송이 생각만큼 길지 않더라고요. 그런데도 숙직실 안에서 그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던 걸 보면 그땐 정말 시간이 천천히 갔나 봅니다. 아니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올라 두뇌가 무섭도록 빨리 회전했던 것일지도요. 어쨌든, 전 숙직이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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