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다른 부처 사무관님에게 들은 말입니다. 전화로 그냥 이 정도면 안 되겠냐고, 좀 살살해달라라고요. 시행규칙 조문 하나 신설하는 건데, 그걸 제가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의미를 따져가면서 꼼꼼히 검토를 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봐주는 건 좋은데 그걸 너무 심하게 자세히 보니깐, 그 사무관님도 업무 부담이 컸던 거죠.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제가 일하는 데 있어서 남들보다 더 까다로운 편이라는 건 주변에서 들어서 알고 있거든요.
제가 업무 기준이 높은 것은 파견 때 만난 과장님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 과장님은 과에서 자신의 일손을 덜어주는 직원은 고참 사무관(행시 수석, 장관 비서 등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선배) 한 명 밖에 없다고 하실 정도로 기준이 높았습니다. 나머지 직원들은 과장님이 일을 시키면 오히려 과장님이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나게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죠. 국 전체를 뒤져봐도 1인분 이상 하는 사무관은 2명 정도밖에 없다고 하실 정도였으니 그 기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도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실 정도로 과장님의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저도 파견이 끝날 때쯤에서야 과장님께서 "어디에 가든지 자기 밑에서 배웠다고 말할 정도는 되겠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드디어 사람으로 인정받았구나라며 뿌듯해했습니다. 과장님의 그 높은 기준에 따라가기 위해 매일 새벽에 퇴근한 보람이 있었죠.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과장님 덕에 높아진 제 눈이 화근이었죠. 파견에서 돌아온 후 함께 일하게 된 주무관님의 고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주무관님이 작성한 자료나 공문, 보고 방법까지 그냥 쉽게 넘어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주무관님께 업무를 할 때도 그간의 관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근거를 찾은 후 해야 한다며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해라고 요구했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적당히 하고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엔 순하고 만만한 사람이 일만 하면 깐깐한 사람으로 변했죠. 사실 주무관님에게만 이러지 않았습니다. 과장님께서 대충 넘어가도 되겠다는 것도 제가 안된다며 과장님을 억지로 공부시켜드린 적도 있었으니깐요.
작년에도 그 부처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동안 저보고 고생 많으셨다며 장관상을 추천하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분명 그 부처 직원들은 저 때문에 힘들어했을 텐데, 그래서 제가 좋은 이미지는 아닐 것 같은데도 이렇게 상을 주겠다고 하니 의외였습니다. 그 후엔 제가 하는 방식이 맞다고 확신해서 더욱 꼼꼼하게 검토했죠. 그런데 지금 와서 살살해달라라니. 충격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장관상도 좋아서 준 게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상을 줄 테니 너무 힘들게 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