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원을 마치고 부처에 발령받기 전의 일입니다. 어쩌다가 부산에서 선관위 서기관님과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퇴직을 곧 앞두신 서기관님은 저희 수습 사무관들에게 공직 상급자를 챙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어느 조직에 가서도 예의 바르다는 소리를 들을 거라면서요. 서기관님의 마음은 감사했지만, 솔직히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1
식당에 가서 신을 벗게 되면 상급자의 신발을 잘 기억해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신발인지, 어디에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상급자가 식당에서 나갈 때 그 신발을 미리 꺼내서 신기 좋게 두는 것이죠. 저는 상급자와 식당에 갈 때마다 고민합니다. 상급자가 신발을 벗으면 제 시선이 그리로 고정되더군요. 신발이 있는 위치까지는 확인해둡니다. 하지만 식당에서 나갈 때 도저히 그 신발에 손이 안 갔습니다. 그래서 아 모르겠다 하면서 그냥 제 신발만 신고 밖으로 먼저 나갑니다. 상급자가 어떻게 신을 신는지 안보는 게 마음이 편하더군요.
#2
술을 마실 때 술병(소주병)을 쥐는 법부터 잔을 부딪히는 법까지 배웠습니다. 먼저 오른손으로 술병의 상표가 보이는 부분을 가린 채 들어서 왼손으로 술병을 받치고 소주잔에 절반보다 살짝 넘게 따릅니다. 따를 때도 술병이 잔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 하죠. 그리고 잔끼리 건배할 때도 제 잔이 상급자의 잔보다 아래에 위치하도록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예의(?)를 지키며 따라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상급자에게 술을 따르는 일이 없도록 빈 잔을 봐도 그냥 못 본 척합니다. 주무관님과 마실 때도 술은 편하게 자작하자고 하고, 잔은 언제나 제가 아래에서 부딪힙니다.
#3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상급자보다 제가 먼저 타고, 내릴 때는 상급자가 먼저 내리는 게 예의라고 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같이 위험(?)한 곳에서 상급자가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상급자가 타기 전에 제가 먼저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엘리베이터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먼저 타게 되더군요. 국장님들도 먼저 타셔서 열림 버튼을 누르고 저희가 들어오는 걸 기다려주시기도 하고요.
#4
이건 좀 그럴듯한 팁이긴 한데, 식당에서 밥 다 먹고 화장실 다녀오는 것보다는 밥 먹는 중간에 화장실 다녀오는 게 더 낫다고 했습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전자의 경우는 일행이 모두 저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니깐 차라리 꼭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후자의 경우처럼 중간에 슬쩍 다녀오라는 것이죠. 그런데 상급자가 한참 말씀하고 계신 상황에서 중간에 자리에 일어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도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몇 번 해보니깐 식사 중간에 화장실 가는 것을 가지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것들을 대부분은 못 따라 합니다. 그냥 이론으로나 머리로 알겠는데 도저히 낯간지러워서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겠더라고요. 후배 사무관님이나 주무관님에게 이런 예의(?)가 있다는 걸 말도 못 꺼내봤습니다. 괜히 농담처럼 이라도 입 밖으로 말했다가는 제가 알게 모르게 이런 대우를 원했다고 소문이라도 날까 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