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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팀장이 미웠다

by 킹오황

5년 전쯤일까요. 갑자기 인사팀장이 불렀습니다. 이제 곧 새로 오시는 장관님의 수행비서를 시키려고 부른 건가 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인사계에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인사팀장은 저보고 당분간 결혼이나 휴직 계획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심장이 쿵쾅 거렸습니다. "수행비서 힘든 자리라고 들었는데 앞으로 바빠지겠구나"라는 걱정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당분간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요. 그랬더니 인사팀장이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저보고 ㅇㅇ부에 파견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더라고요.


속으로 당했다 싶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나는 윗사람에게 의전 못하는 걸로 소문났는데 무슨 장관 수행비서냐, 제 주제를 알아야지. 그렇다고 파견을 가긴 싫었습니다. 지금 일 하는 자리에 만족했었거든요. 별로 안 가고 싶다고 소심하게 말했지만, 인사팀장은 차관님까지 보고를 다 마친 상황인데 본인이 싫다면 꼭 억지로 보내진 않겠다라네요. 어쩌겠습니까. 차관님까지 오케이 하셨다는데 그걸 뒤집을만한 깡은 없었습니다. 인사팀장은 대신 돌아오면 정말 좋은 자리로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짐을 싸게 되었습니다.




1년이 흘러 파견 기간이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부처에서 복귀하라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 답답해서 인사팀장에게 언제 돌아가는 거냐고 먼저 물어봤습니다. 그새 새 인사팀장으로 바뀌어 있었더라고요. 그랬더니 파견을 좀 더 연장하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요. 파견 갈 때 인사팀장이 이야기한 것이랑 달랐죠. 저는 무슨 소리냐며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 오면 후회할 수도 있다는 협박성 멘트까지 들었죠.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든 좋다며 저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최악의 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어디냐고요? 바로 파견 가기 전에 일했던 저의 자리였습니다. 저의 후임자가 다른 부처로 전출을 가는 바람에 그 자리가 비어 있긴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있던 자리에 보내 줄은 몰랐습니다. 심지어 컴퓨터도 제가 쓰던 컴퓨터였습니다. 컴퓨터에 저의 gpki(공무원용 인증서)가 그대로 깔려 있어서 컴퓨터 켤 땐 좀 편했다는 게 작은 위안이었습니다.


어쨌든 파견에 돌아와서 똑같은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파견 가기 전에는 4명이서 하던 업무를 2명이서 하게 된 것만 빼고요. 심지어 짝꿍 주무관이 바로 휴직 들어가는 바람에 혼자서 몇 달을 일했죠. 이때가 가장 바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복도에서 지나가다 마주친 다른 국장님도 요즘 힘들지라며 위로하실 정도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겪었으니 제가 인사팀장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동료 공무원들이 인사에 불만이 있으면 꼭 겉으로 표현해라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웃는 얼굴로 고분고분하게 대했더니 이런 대우를 받게 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옛 말이 틀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날을 보내다가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부처에서 사무관을 받는다는 전입 공고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곧바로 지원을 했고 결국 합격했습니다. 단, 제가 있는 부처에서 저를 놔준다는 전제 하에요. 국장, 과장님께는 이미 허락을 받았지만, 인사계에서 반대한다거나 차관님께서 결재를 안 해주시면 못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땐 저도 순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인사계에서 딴 소리 못하게 도리어 큰 소리를 쳤습니다.


"파견 다녀오면 좋은 자리로 보내주겠다고 했으면서 심지어 예전 자리로 보낸 것 기억하시죠? 그때도 아무 말 안 하고 참았습니다. 그러니 인사계에서는 제가 전출 가는 거 반대하시면 안 됩니다. 차관님께 잘 말씀드려서 결재받아주세요. 저 안 놔주시면 차관님께 제가 인사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었는지 다 말할 겁니다!"


그랬더니 일이 잘 풀려서 부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목소리를 크게 내어야 할 때도 있다는 거니깐요. 식당에서 밥 먹는데 머리카락이 나와도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가는 저 같은 사람이 살기는 어려운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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