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하던 업무 중에는 외부에 티를 안 내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괜히 잘하고 있다고 홍보했다가는 관련 단체들의 반발을 사기 쉬운 업무였죠. 그렇다고 꽁꽁 숨겼다가는 또 언론이나 국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 쉬워서 줄타기를 잘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 제출하거나 발표해야 하는 자료를 작성할 때 난감했습니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을 수가 없다 보니 자료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성을 안 할 수는 없었죠. 어떻게 적든 과장님께 한번 혼이 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억지로 양을 채워서 작성한 보고서를 과장님께 가져간 적이 있었습니다. 과장님께서는 보고서의 목차를 보시더니 볼펜으로 크게 사선을 그으셨습니다. 저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보신 과장님은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저를 앉히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무관, 네가 지금 아무 내용 없는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건 알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보고서를 써야 할 때도 있어. 하지만 내용이 없을수록 포장이라도 잘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도 우리 부처 이름을 걸고 나가는 보고서인데 말이야. 목차나 표지 같은 건 선배에게 좀 부탁해서 멋진 양식으로 받아봐."
저는 글을 싱겁게 쓰려고 합니다. 행정고시 답안을 쓸 때도 딱 묻는 것만 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화려한 수식어로 목차를 쓰고 거기다 멋들어진 부제까지 달아서 채점자의 눈길을 끌었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실 못 했습니다. 애를 써봐도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본문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스타일이다 보니 공직에서도 할 말이 없는 보고서를 포장해서 쓰기 어려웠습니다. 꼭 써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충 쓰더라도 이 고비만 넘기자고 했죠. 그러다가 과장님께 딱 걸린 거였습니다. 과장님께서 저의 나태한 모습에 화를 내지 않고 잘 타이르셨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이런 잘못은 다시 하지 말자며 사진까지 찍어 남겨두었고요.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요 ^^)
지금은 제가 작성하는 보고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 과제를 하는 게 아니라 부처 이름을 걸고 나가는 자료를 작성하는 것이니깐요. 가끔씩 하기 싫어도 그 과장님의 가르침을 생각해서 억지로 포장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 예전보다 성숙해진 것 같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