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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May 01. 2022

내용이 없으면 꾸미기라도 잘하던가

제가 하던 업무 중에는 외부에 티를 안 내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괜히 잘하고 있다고 홍보했다가는 관련 단체들의 반발을 사기 쉬운 업무였죠. 그렇다고 꽁꽁 숨겼다가는 또 언론이나 국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 쉬워서 줄타기를 잘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 제출하거나 발표해야 하는 자료를 작성할 때 난감했습니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을 수가 없다 보니 자료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성을 안 할 수는 없었죠. 어떻게 적든 과장님께 한번 혼이 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억지로 양을 채워서 작성한 보고서를 과장님께 가져간 적이 있었습니다. 과장님께서는 보고서의 목차를 보시더니 볼펜으로 크게 사선을 그으셨습니다. 저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보신 과장님은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저를 앉히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무관, 네가 지금 아무 내용 없는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건 알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보고서를 써야 할 때도 있어. 하지만 내용이 없을수록 포장이라도 잘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도 우리 부처 이름을 걸고 나가는 보고서인데 말이야. 목차나 표지 같은 건 선배에게 좀 부탁해서 멋진 양식으로 받아봐."




저는 글을 싱겁게 쓰려고 합니다. 행정고시 답안을 쓸 때도 딱 묻는 것만 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화려한 수식어로 목차를 쓰고 거기다 멋들어진 부제까지 달아서 채점자의 눈길을 끌었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실 못 했습니다. 애를 써봐도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본문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스타일이다 보니 공직에서도 할 말이 없는 보고서를 포장해서 쓰기 어려웠습니다. 꼭 써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충 쓰더라도 이 고비만 넘기자고 했죠. 그러다가 과장님께 딱 걸린 거였습니다. 과장님께서 저의 나태한 모습에 화를 내지 않고 잘 타이르셨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이런 잘못은 다시 하지 말자며 사진까지 찍어 남겨두었고요.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요 ^^)


지금은 제가 작성하는 보고서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 과제를 하는  아니라 부처 이름을 걸고 나가는 자료를 작성하는 것이니깐요. 가끔씩 하기 싫어도  과장님의 가르침을 생각해서 억지로 포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예전보다 성숙해진  같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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