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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Apr 28. 2022

단어 하나에 미친다는 것

법령 심사를 하다 보면 미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미칠까 봐 걱정이 됩니다. 글자 하나하나 따져 가다 보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예전에 고민했던 걸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 안전기준을 준수하였음을 증명하는 서류

2. 안전기준을 준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


법령에 '신청인이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명시해야 하는데, 저는 1번과 2번이 다른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1번은 '신청인'이 안전기준을 준수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2번은 제출받은 서류를 '공무원'이 확인하여 안전기준을 준수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인 신청인의 편의를 위해서는 안전기준의 준수 여부의 판단 책임을 신청인이 아닌 공무원에게 맡기는 게 맞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래서 1번으로 규정된 것을 2번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당 법령의 소관 부처도 그렇게까지 봐야 하냐며 제 의견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제가 주변에 물어봐도 1번이나 2번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너무 과하게 고민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고요. 몇몇은 제가 너무 지엽적인 것만 파고들다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변명을 해보자면요. 먼저 법은 바꾸기 어렵습니다. 한 번 정할 때 고민을 많이 해야 하죠. 하지만 실질적으로 고민할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시간을 다투는 업무가 산더미입니다. 한 번은 어떤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률 개정안을 제가 하루 만에 검토해서 답을 줬던 적도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검토 시간을 딱 하루 주더라고요. 심지어 그때 제가 준 문구 그대로 국회에 통과가 되었죠. 가끔씩 심심해서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그 법을 확인해봅니다. 그럴 때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더 좋은 문구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검토할 시간이 있을 때 단어 하나에 더 세심한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상하게 만들어진 법을 보면서 후회하고 싶지 않거든요. 변명이 잘 통할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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