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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과장님이란

by 킹오황

얼마 전에 서기관님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기억에 남는 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한 서기관님이 말씀하신 좋은 과장님의 요건이었습니다.


"좋은 과장님이란 말이야, 어? 빠른 의사결정, 구체적인 지시. 딱 이거 두 개면 돼. 거기다 하나 더 보태자면 뭐가 있을까. 사무관이 일한 거에 대해 책임져주는 거 정도?"


저는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어떤 과장이 좋은 과장일까 고민은 많이 해봤지만, 간단하게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저 두 가지를 갖춘 과장이라면 같이 일하기 참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 그럴듯한 답이었죠.


사실 말은 쉬운데 저게 참 어렵습니다. 일단 의사결정을 하려면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진짜 문제점을 도출해야 하고, 내가 내린 결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예상해야 합니다. 평소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런 고민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빠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면 아무리 1~20년 경험이 있는 과장이라도 허둥지둥거리게 마련입니다. 생각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딱 결정을 내려주지 못한 분도 꽤 있었습니다. 보고는 타이밍이라는데 이걸 놓쳐서 곤란해하는 경우도 많이 봤고요.


의사결정을 한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국장이나 실장, 때로는 장차관에게까지 보고를 해야죠. 그러려면 보고자료를 들고 들어가는 게 국룰(國rule)입니다. 그래서 사무관에게 보고서를 쓰라고 시키게 됩니다. 이때 과장은 어떤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능한 과장은 사무관에게도 설명도 참 잘해줍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보고서를 써야 할지를 목차부터 필요한 데이터까지 다 상세히 알려줍니다. 물론 그걸 다 들었다고 한 번에 보고서가 완성되진 않는 게 함정이지만요.


반면에 그렇지 않은 과장님은 지시도 매우 추상적입니다. 예전에 이런 식으로 지시를 받는 바람에 주말 내내 고민하며 보고서를 썼던 적도 있었습니다.


"국장님이 다음 주 월요일에 ㅇㅇ대책에 대한 회의에 가야 하는데, 우리 부처 입장이 뭔지 한번 만들어봐."




그나저나,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빠르게 의사결정을 하고 구체적으로 지시를 했지만 그 일이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 일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라 모든 게 다 잘 풀리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빠른 의사결정보다 좀 느려도 정확한 의사결정이 더 나은 거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땐 바로 못 물어보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좋은 과장이란 그 두 가지만 갖춰도 충분할까. 그러다 서기관님이 끝에 하나 덧붙인 게 떠올랐습니다. 일이 잘못됐을 때 과장이 나서서 책임진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앞의 두 덕목과 시너지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과장의 지시를 사무관은 빠르게 이행하기만 한다면 사무관의 할 일은 끝난 거고, 그 후의 일은 과장이 책임진다는 것이니깐요. 그럴 거면 사무관 입장에서는 빨리 결정을 해주는 게 더 편하죠. 서기관님이 왜 그런 말씀을 했는지가 이해가 되더군요.


사실 서기관님이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말씀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그때 저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을 못 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어떤 과장이 좋은 과장인가를 고민해왔기 때문에 지나가는 말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말에 꽂힌 저는 퇴근해서도 좋은 과장이 뭔지 고민도 하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까지 쓰고 있으니, 이건 다 서기관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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