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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제가 하면 안 되나요?

by 킹오황

제가 수습 사무관일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다른 국의 고참 사무관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국회의원 요구자료가 왔는데, 자기 생각엔 자기가 아니라 제가 그 업무의 담당인 것 같다고 하셨죠. 당시 저는 제 업무의 범위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신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무관님께 의원 요구자료를 보내주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죠.


답변자료를 열심히 작성했습니다. 자료를 과장님께 보여드리기 전에, 같은 과 선배 사무관님에게 먼저 보여드렸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5년 선배였는데, 과장님의 지시를 받아 저에게 일하는 법을 알려주시는 멘토 사무관님이었죠. 평소에 항상 웃으시는 분이었는데, 그날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관님, 이렇게 일을 덥석 받아오면 어떡해요. 이거 우리 업무 맞아요?"

"아, 저는 그 사무관님이 저희 업무라고 하셔서 당연히 저희 건 줄 알았어요."

"그러니깐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은 진짜 우리 업무인지 검토를 해야 해요. 다른 국 업무인데 우리가 받아서 답변자료를 제출하기 시작하면, 그땐 진짜 우리 업무가 되는 거예요. 사무관님이 잘 모른다고 이렇게 받으면, 나중에 뒷감당이 힘들어질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우리 업무라고 보이지도 않아요. 우리가 답변자료를 쓰려면 먼저 과장님들끼리 업무분장이 먼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엔 사무관님 말씀이 공무원들이 서로 자기 업무 아니라고 미루는 일종의 '전화 돌리기' 같은 건가 했죠. 그래서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냥 제가 쓰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멘토 사무관님은 그런 게 아니라며 차분하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사무관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단순히 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만 제가 쓰고 다음에 어디 부서의 업무인지 소관을 가리고 싶어도, 제가 쓰는 순간 저희 업무가 되어버리더라고요. 그럼 앞으로 저뿐만 아니라 제 후임자도 제가 객기로 답변을 썼다는 사실에 구속되어 그 업무를 맡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멘토 사무관님이 이렇게까지 강조해서 말씀하신 건, 이번 건만이 아니라 앞으로 업무를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업무와 관련해서 보여주는 제 개인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잘 생각하라는 것이죠.


공무원이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자기 일 아니라고 미루는 행동이 어쩌면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기 업무 영역도 아닌데 괜히 건드렸다가 더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납니다. 언젠가 다른 부서의 공무원이 기자와 전화 통화 중에 자기 분야도 아닌데 자기 생각을 말했는데, 그게 녹음되어 방송까지 나오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지도 않은 통화에 대해 뒷수습하면서, 모르면 가만히 있지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냐며 그분을 원망했었죠.


그래도 전 천성이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걸 싫어해서 그런가, 무조건 내 업무는 아니다라는 말은 하기 어렵더라고요. 대신 잘못 걸려온 전화라도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소관 부서의 담당자를 찾아 전화번호를 알려주려고 합니다. 물론 제 업무 분야도 아닌데 제 의견을 말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제 의견이 공식적인 답변도 안 될뿐더러 괜히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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