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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명함 주고 후회한 일

by 킹오황

아직 정식으로 부처 발령받기 전 지방 연수로 도청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동기들과 스키장에 가서 보드를 탔습니다. 제가 그때 보드는 좀 서툴렀거든요. 재미있게 타다가 그만 어떤 아저씨와 좀 세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그분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면서, 혹시 문제 생기면 연락 달라며 호기롭게 제 명함을 드렸습니다. 거기 제 전화번호도 찍혀 있었거든요. 아, 정식으로 발령받은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지방자치단체에서 수습 사무관들에게도 명함을 만들어 줬었거든요. 뭔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제 지갑에 몇 장 넣고 다녔다가 그때 써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기들에게 이런 사고가 있었고 명함을 줬다니깐 다들 왜 그랬냐며 저를 나무랐습니다. 제가 공무원인 걸 알고 상대가 악한 마음에 병원비를 청구하거나 합의금을 달라면 어떡하냐면서요. 저는 그 사고가 있었을 때 그분이 괜찮다고 그랬기 때문에 진짜 연락이 오진 않을 거라고 했지만, 솔직히 좀 걱정됐습니다. 필요하면 제 전화번호를 이야기했으면 됐을걸, 괜히 명함을 드린 게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그날 밤 진짜 문자가 왔습니다. 약간 문제가 생겼다면서요. 저는 속으로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신분을 이용해서 혹시라도 과도하게 청구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자수하자면, 별로 친하지도 않은 변호사 동기에게 전화해서 상담까지 받았습니다. 변호사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더군요.


그분에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보드 장비가 부서졌다며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보드 수리비와 보드 렌탈비로 3만 5천 원을 보내달라더군요. 심지어 영수증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의료비 청구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고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내가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알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싼 값에 깨닫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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