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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Sep 21. 2022

말하고재비 공무원

제 아내는 저를 이렇게 부릅니다. "말하고재비"라고. 하고재비가 경상도 방언인데 무언가 하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란 뜻이랍니다. 아내는 제가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말하고 싶을 때면 막 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움찔움찔하는 게 보여서 웃음이 나온답니다. 사실 아내랑 너무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제 맘을 몰라주네요.


아내가 절 어떻게 부르든 간에, 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내내 아내와 대화를 시도합니다.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우리 미래의 계획도 세워보고, 같이 본 영화나 넷플릭스의 감상평을 공유합니다. 아내는 원래 과묵한 편이라 주로 듣는 역할을 하지만, 가끔은 저보고 듣는 것도 지친다며 잠시만 좀 조용히 있으면 안 될까라며 부탁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기 싫어하는 집돌이임에도 불구하고 MBTI에서 E 성향이 나오는 건 바로 이런 말하고재비 성격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제 의견을 알리고 설득하고 싶어 하죠. 제 아내는 저보고 강의 체질이라고 그럽니다. 심지어 사주까지도 제가 교육 분야와 잘 맞다네요.


이런 성격이 공무원 조직에 잘 어울리는 건 아닙니다. 공무원들은 어디 나서거나 튀는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거든요. 공무원을 대상으로 교육하러 온 강사들은 서두에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공무원 앞에서 교육하는 게 젤 어렵다고. 강사의 말에 아무도 반응을 안 하거든요. 질문은커녕 고개도 끄덕이지도 않고 그렇다도 딴짓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강사만 집중해서 바라본다네요. 이러는데 얼마나 강사가 힘들겠습니까.


저도 그런 조직의 특성을 알기 때문에 업무시간에 최대한 조용히 있으려고 합니다. 회사에서 가만히 있다 보니 말하고재비 성격에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퇴근만 하면 아내와 열심히 대화하는 게 일상이 되었나 봅니다. 부부끼리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잖아요?



지금 저는 지자체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화나 인터넷으로 법과 관련해 상담하는 업무도 맡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있죠.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퇴근하고 나면 지쳐서 말을 많이 못 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지금 상황을 오히려 더 좋아하더라고요. 말하기를 좋아하는 저에게 딱 맞는 자리라면서요.


사실 저도 이 자리에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예전 업무도 재미있었지만 지금 업무는 더 재미있거든요. 주변 직장 동료분들은 저보고 신기해합니다. 공무원 일이 재미있다니! 말을 많이 할 수 있단 점을 떠나서, 남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제 지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감사 인사를 들을 땐 보람도 느끼고요. 특히나 저도 바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땐 도전의식도 생깁니다. 국과장님을 찾아다니며 의견을 듣고, 책이나 자료를 뒤져가며 해결책을 찾게 되었을 땐 정말 뿌듯합니다.


아울러 다양한 지역의 공무원들과 통화하면서 얻는 또 다른 즐거움도 있습니다. 저도 촌에서 올라와서 사투리를 많이 쓰는 편이지만, 매일 전국 각지의 사투리를 듣는 것이 꽤 흥미롭거든요. 일하면서 대화의 즐거움까지 얻는 다라. 오랫동안 여기서 일하고 싶네요.




여담입니다만, 저희 아버지가 말씀이 참 많으신 편입니다. 아내와 함께 고향에 내려가면 아버지의 오디오가 대화의 80%는 넘게 차지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량은 아버지를 상대하는 며느리가 채웁니다. 아들과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하고 싶어 하는 욕심을 알기 때문에 대화에 끼어들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제가 아내를 위로합니다. "아버지랑 대화하느라 힘들었죠" 하면서요. 그런데 이게 웬걸. 아내의 답이 의외였습니다.


"말하고 싶어 하는 건 아버님이랑 당신이랑 완전 똑같은걸요. 듣는 게 익숙해서 그런지 전혀 문제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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