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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Sep 25. 2022

보드게임을 하는 아내

요즘 저랑 제 아내는 보드게임 카탄(Catan)을 즐겨합니다. 실제 보드게임은 아니고 온라인 게임으로요. 퇴근하면 저녁 내내 둘이서 아이패드 하나 들고 옥신각신하며 붙어 있습니다. 주말에도 어디 경치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면서 카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맥주 마시면서 또 카탄을 합니다.


하루 종일 둘이 붙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당연히 대화 주제는 카탄입니다. 예를 들면 "방금은 기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은행에 자원을 바꿔서 도시를 개발했어야 했다"거나, "숫자 5가 너무 안 나오는데, 주사위가 조작된 것 아니냐"라거나 이런 대화이죠.


원래도 둘 사이가 돈독했는데, 함께 게임을 하면서 더 친해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닙니다. 카탄을 하면서 아내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승부욕이 강해서 실력이 아니라 운에 의해 게임이 결정되면 굉장히 열을 받는 성격입니다. 실력으로 지면 분하지만 인정하는데, 나보다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운으로 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카탄과 같이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가 중요한 게임은 조금만 잘 안 풀려도 속에서 막 열불이 납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게임 중에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하더군요. 자기만 주사위 운이 너무 안 좋다거나, 상대(대부분 외국인입니다)가 고의로 게임을 망치더라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습니다. 한숨도 쉬지 않고요. 게임의 시작과 끝이 한결같습니다.


이런 성격은 일을 할 때도 큰 장점이 됩니다. 공직 업무 특성상 일이 마음대로 안 흘러가는 경우도 많은데, 이때 공무원이 당황해하고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이 다 불안하게 됩니다. 비록 마음은 힘들더라도 겉으로 별일 아닌 듯 대처하면 진짜 조용히 잘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큰 일도 아닌데 괜히 아랫사람들에게 불안감만 조성한다는 악평을 받는 상사들도 꽤 많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런 아내의 차분한 성격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라면 그냥 화내면서 게임을 껐을 상황임에도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역전해서 이기는 경우도 많았고요. 아내가 저랑 몇 년을 넘게 만나면서도 화를 한번 안 냈던 것이,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아내의 잘 참는 성격 때문이 아닌가 싶더군요. 이런 보살 같은 아내를 만난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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